졸업하고 첫 직장이 부산의 조선소였다. 같은 사무실에 여직원이 들어왔는데 이양! 이라고 불렀더니 돌아서서 “부산와서 초잡았네“ 한다. 원래 부산이 고향인 아가씨인데 서울로 유학가서 명문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부산 소재 대기업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서울에서는 모두 ‘미쓰리’라고 호칭을 하는 데 지방으로 내려가니까 (당시 부산에서는 미혼 여성을 ‘미스 아무개’라 하지 않고 ‘아무개 양’이라고 불렀다.) 자기를 비하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나 보다.

1972년이니까 벌써 42년 전 이야기다.

2000 년 하고도 10여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위상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 중 한글의 우수성은 현대 컴퓨터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가게 간판에 의미도 별로 없는 한글을 써 놓는(아마 은근히 고급을 연상시키려는 의도일 것) 경우도 있다하고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는 한글 능력 시험에 합격하면 대단한 자부심을 갖는다고도 한다.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예전에는 외국 물건, 외국인, 외국 말은 무조건 높은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한국어를 잘 못하면 인기(?)가 있었다. 외국인이거나 외국에서 사는 교포일테니까. 우리 자신을 엽전이라고 비하하면서 한글도 천대했던 게 사실이다. 한문이거나 영어를 써야 지식인이고 외제 물건은 국산보다 항상 고급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오히려 국산이 대접받고 있다. 일부 세계적 명품은 제외하고 전화기, TV, 냉장고, 선박 등 일부 공산품은 최고급으로 인정받는다. 이제 우리도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헌데 이상스럽게도 이런 한글이 푸대접받고 있는 곳이 한국이다. 아직도 한글을 외면하고 불필요하게 외국어를 사용하는 예가 많이 있다. 적절한 우리 말이 없을 때 외국어를 빌려 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엄연히 우리말이 있고 또 현재 상용하는 말을 굳이 외국어로 표기하는 것은 불편과 혐오감을 준다. 여자들 화장품이나 옷에 관한 외국어는 거의 공해 수준이다. 한글을 쓰면 촌스럽고 외국어를 쓰면 고급스럽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해외 고객을 상대로 하는 회사이름이나 관광용 이라면 몰라도 구멍가게, 아파트, 가수 이름 등등 모두가 외국어 열풍이다. 고급 건물의 화장실에도 한글은 보이지 않는다.

달력에는 어느 때부터인가 월, 화. 수...가 없어지고 Mon Tue Wed 만 있다. 전에는 그래도 영어 한 편 쪽에 월, 화, 수를 표기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다. 아마도 영어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대충 눈짐작으로 가운데 있으면 수요일, 약간 오른 쪽이면 목요일, 상당히 오른 쪽에 있으면 금요일 정도의 감으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새 달력을 받으면 월,화,수...를 써 넣는다.)

일전에 화동연우회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보았다. “라쁘띠뜨위뜨”라고 하는 제목으로 무인도에 세 남녀가 벌이는 희극인데 무척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주제도 재미있고 연기도 일품이었다.

그런데 제목이 프랑스 말 같은데 무슨 뜻인지 통 알 수가 없다. (젠장 프랑스말 모르면 서러워 살겠나.) 혹시 관객이 뭔지 모르고 보는 것에 의미를 두었나?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알고 볼테니 한글로 “작은 오두막” 이라 해야 하나?

프랑스 말은 멋있고 한국말은 멋없고?

이러다가 “메리김양과 존리군의 웨딩을 스타트하겠습니다.“ 하는 결혼식도 나올까 걱정된다.

이런 생각이 시대에 뒤떨어진 늙은이 옹고집의 국수주의적 발상인가, 서글픈 반항인가, 아니면 씰데없는 참견인가? 아니면 당연한 생각인지 동기들 의견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