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산책 15> - 한 글자(一字)의 묘미

 詩作과 관련하여 ‘一字師’라는 말이 있다. ‘한 글자를 바로잡아 고쳐준 스승’이라는 의미인데, 詩文의 한 글자를 고쳐 한 단계를 올라서는 좋은 작품이 되게 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핵심을 깨우쳐 줌을 비유하는 말로도 널리 쓰인다. 오늘은 ‘一字師’의 逸話를 몇 가지 소개한다.

 전해지는 ‘一字師’의 일화 가운데, 唐나라 末의 詩人 정곡(鄭谷 ?-?)과 詩僧 제기(齊己 864?-943)의 일화는 대표적이다. 정곡은 원주(袁州) 의춘(宜春. 지금 江西省) 사람이다. 생애는 불확실하나 唐 僖宗 光啓 3년(887)에 進士가 되었고 벼슬을 좀 하다가 낙향하여 만년에는 고향인 의춘 앙산(仰山)에서 은거하였다.  제기(齊己 864?-943)는 唐末에서 五代시대에 걸쳐 으뜸가는 詩僧으로 꼽히는데 그의 시는 基調가 ‘맑고 담담(淸淡)‘하다고 정평이 나 있다.

 정곡이 원주에 있을 때, 제기가 <早梅>(일찍 핀 매화)詩를 지어 가르침을 청했다. 정곡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 생각하더니, 제기가 보여 준 시에,

   前村深雪裏(전촌심설리) 앞마을 깊은 눈 속에

   昨夜數枝開(작야수지개) 어제 밤 몇 가지가 피었네.

라 한 것에서, 일찍 핀 매화에 ‘數枝(몇 가지)’는 어울리지 않으니 ‘一枝(한 가지)’로 고치라고 했다. 고쳐 놓고 보니 일찍 핀 매화의 정취가 더욱 살아나는 느낌이다. 제기는 그 자리에서 가사를 걷어 올리고 정곡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한다. 『五代史補』, 『唐詩紀事』 등에 전하는 일화이다.

 장괴애(張乖崖)는 宋 太宗, 眞宗 때의 名臣이다. 어느 날 知人인 소초재(蕭楚才)를 청해 밥을 먹었다. 소초재가 우연히 책상 위에 놓인 장괴애가 지은 시를 보고 그 가운데,

   獨恨太平無一事(독한태평무일사) 홀로 태평세월에 일 없음을 한하노니

   江南閑殺老尙書(강남한쇄노상서) 강남에 한가로움 겨운 늙은 상서일세.

라 한 것을 보았다. 소초재는 高官인 장괴애가 ‘태평한 세월을 한탄한다’함은 곧 반역의 뜻으로 해석 될 수 있다며, ’恨‘을 ’幸‘으로 고쳐서 ‘홀로 태평함을 다행스러워 한다’라는 뜻이 되게 하였다. 장괴애는 소초재에게 그대는 나의 ‘一字師’라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苕溪漁隱叢話』 『詩話總龜』 등에 전한다.

       *‘閑殺’는 ‘매우 한가롭다’이다. ‘殺’은 ‘매우, 심히’의 뜻으로 쓸 때는 ‘쇄’로 읽는다.

 조선 중기 李敏求(1589-1670)가 <金剛山>詩를 지어 조심스럽게 김상헌(金尙憲1570-1652)에게 보였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先戰後和론을 주장하여 청나라에 위험한 인물로 지목받아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4년간 억류생활을 한 바 있는 문단의 원로였다. 이민구의 시에,

   千崖駐馬身全倦(천애주마신전권) 천길 벼랑에 말 세우니 몸이 온통 피곤하여

   老樹題詩字未成(노수제시자미성) 늙은 나무에 시를 쓰려 해도 글자가 되질 않네.

라 하였는데, 김상헌이 시를 읽고 ‘字未成’을 ‘字半成’으로 고쳤다. ‘字未成’은 ‘아예 글씨가 써지질 않는다’는 의미인데, ‘字半成’은 ‘글자를 반쯤 쓰고 나니 너무 지쳐 마저 채울 기력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한 글자를 바꾸어 작품의 精彩가 더욱 살아남을 느낄 수 있다.

 김부식(金富軾.1075-1151)의 <咏春>(봄을 읊음)의 경우는 귀신이 나타나서 自請하여 ‘一字師’ 노릇을 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어느 한가로운 봄날 김부식이 봄을 주제로 詩句를 지었다.

   柳色千絲綠(유색천사록) 버들 빛이 천 줄기가 푸르고

   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복숭아 꽃이 만 송이가 붉네.

        *‘柳色’은 문헌에 따라 ‘楊柳’로도 씀.

 이렇게 지어 놓고 김부식은 제법 괜찮은 詩句라고 흐믓해 하고 있는데, 홀연 공중에서 ‘鄭知常의 陰鬼(鄭鬼)’가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후려치면서 “천 줄기, 만 송이는 누가 세어 보았느냐?(千絲萬點 有孰數之也)”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버들 빛이 줄기마다 푸르고 / 복숭아꽃이 송이마다 붉네)이라 하지 않는가?”라고 하여 김부식이 몹시 기분 나빠했다는 이야기다. 고쳐진 詩句가 더 묘미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 일화는 묘청의 난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 정지상(한시산책 14 참조)을 편들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인듯한데,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詩에 관련된 일화를 모아 엮은 『백운소설(白雲小說)』 등 시화집에 전한다.

 淸 원매(袁枚1716-1797)는 ‘詩는 한 글자만 고쳐도 경계가 하늘과 땅 차이로 판이하다.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고 하였다.

 詩作에서 ‘一字師’처럼 인생에서도 판이하게 한 차원 높은 인생이 되도록 넌지시 한 글자 짚어줄 스승을 만나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 짚어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