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일가족 일곱 명이 자리잡은 곳은 동숭동 언덕배기 그것도 허름한 남의 집 구석방 한 칸. 아마 맹모삼천지교는 아니더라도 서울대학이 내려다 보였고 멀지 않은 곳에 광장시장 평화시장이 있었으니 생업꺼리 찾기가 어렵지 않으리라는 선견지명 아니 궁여지책에서였을까? 그러나 代書房에 나가 글씨를 대신 써주는 일로 생업을 삼으신 아버님과 삯바느질 옷수선 빨래 등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으신 어머님의 고단한 삶... 시골보다 더 궁벽하게 지내야했던 鄭氏一家 식솔의 모습이 어떠했겠나? 국민학교 때는 물론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면서 입주과외를 하기 전 때까지도 도시락 없이 점심을 굶어야 했다는 운찬의 僅僅圖生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에서 가르침을 받았던가? 그의 삶을 받치는 밑바탕이 되어 오래 참고 때를 기다리는 내성을 키워주고 정직과 성실이라는 큰 德目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그렇다. 가난도 운으로 바꾸어 놓는 기차게 운이 좋은 사람도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출세 이야기에는 어린 시절의 가난과 총명, 정직과 성실이라는 말 외에 으레 따라 다니는 말이 하나 더 있다. 행운을 가져다 준 인연! 因緣도 뜻이 되겠지만 우연일 수도 있는 人緣을 말한다. 인연이 가져다 준 행운!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등록금 걱정이 태산 같던 운찬에게 찾아온 人緣... 그리고 따라온 幸運... 같은 반 친구 아버님을 통해 만나게 된 스코필드 박사와의 숙명 같은 만남이다. 길게 쓰기도 오래 읽기도 어려운 글이라 간략해야겠지만 경기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해 주시고 간간히 생활비까지 보태주시고 인생의 행로에서 헤맬 것 같은 소년 정운찬에게 영원한 나침반(그의 표현)이 되어 주셨다 하니 거짓말 같은 사실이란다. 그 뒤로 십년이나 지속된 소년 정운찬과 노년 스코필드 박사와의 人緣... 다른 말로 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운찬아, 혹시 ‘60년을 뛰어넘은 우정’이라고 해도 좋을까? 지금 우리 나이가 스코필드 박사와 처음 만날 때의 그 분 나이가 되고 보니 友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지. 그 때는 몰랐어도 이젠 시공을 초월해 그 분의 마음과 훤히 통할 테니 말이다.

II.  그의 과거 2

우리들이 50여년 전 같은 모자 같은 교복을 입고 학창시절을 보낼 때 그는 어떤 학생이었던가? 오래된 과거는 뿌연 유리창을 통해 보듯 아련하지만 그의 모습은 새로 안경을 맞추고 보듯 새삼 내 기억 속에 또렷하다. 키만 훌쩍 커서 뒷줄에 앉았던 나하고 앞줄의 운찬이하고 말을 섞었던 기억은 안 나지만 귀공자(모범생? 부잣집 아들?) 같은 얼굴과 튀어나온 뒤통수가 선하다. 사실 동급생 중에 대갓집 자제 같이 잘 생기고 공부 잘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누구누구 또 누구. 집안 형편이 꽤나 어려워 소풍마다 지레 빠지곤 했던 나는 가난의 열등감에 움추려 지냈던 편인데... 이제 알고 보니 나보다 더 열악했던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다. 아니! 운찬이 같이 멀쩡하게 생긴 친구가 도시락도 못 싸오고 굶고 지냈다니... 전혀 내색하지 않았던 그의 내공이 대단하다.

대담 중에 그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또 현실과 마주쳤던 어려움을 토로했다. 빨리 사회로 나와 어머님을 고된 삯일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그 당시 월급이 제일 많다는 충주비료 같은 곳에 취직해야 하고 그러려면 공대 화공과 같은 데를 들어가야겠는데... 이과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정만진 생물 선생님의 설득과 경제과에 1년 먼저 들어간 친한 선배의 我田(경제과)引水(좋은 후배 끌어오기)에 끌려 경제과를 선택했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우리나라 최고의 경제학자라는 사람도 이렇게 쉬이 전공을 선택했다는 말인가? 그의 인생의 큰 흐름이 바뀌는 순간이다. 비약하자면 우리 현대사의 한 구비도 바뀌는 순간이 아니겠나?

대학에 들어간 그는 누구나 그러했듯이 초중고 12년의 타율에서 벗어난 해방감에 들떠 공부는 뒷전이요 일탈을 즐기는 ‘방황하는 젊은이’가 되어 상과대학 초년을 시시하게 보낼 즈음에 입주과외 하던 집에서 만난 선임 가정교사 신영복 선배(경제학과 7년 위)의 “경제학은 제대로 공부해 볼만한 학문”이라는 충고와 추천도서 두 권(사회구조론과 조선사 敎程)이 경제학에 대한 그의 立志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하는데... 그보다 더한 인연으로 2학년 2학기 때 그의 인생2막에 주연배우처럼 등장한 분이 있었으니 그의 師父 조순 선생님이시다. 첫 강의부터 젊은 교수님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지식으로 칠판을 가득 채우며 학생들을 압도하셨다 하니 운찬이의 경제학자로의 길은 이 때 정해진 것이리라. 세 시간 강의의 중간 휴식 시간에 그는 칠판을 천천히 지우며 강의 내용을 복습하는 공부 습관을 갖게 됐다는데... 이 거 어디서 듣던 얘기 같다. 미국에도 영국에도 일본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던데 한국에도 생겼네. 늘 누군가의 눈에 들려면 관심을 끌고 환심을 사야 하는 법 아니던가? 정운찬의 다음 말에 그 때의 느낌이 그대로 들어있다.
“진정으로 나는 조순을 만나 드디어 경제학을 발견했다.”

대학을 나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인 취직을 했는데 한국은행 외환과 창구 담당이라... 여기 있을 거면 칠판 지우는 일 안했어도 경제학에 골몰하지 않았어도 되지 않나? 상대 나오지 않은 내가 알 턱이 없지만 분명 어머님을 위한 선택이었으리라. 그런데 한 해 지나고 조순 선생님의 종용을 받아 유학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뒤 어머님께 아뢰었을 때 언제 그런 밝은 모습을 보이셨던가? 활짝 웃으셨다는 얘기다. 부모님이 다 그렇지. 자식에게 그것도 운이 찬 아이에게 생활의 족쇄를 채우시겠나?

그렇게 떠난 유학길, 마이애미대학에서 1년 프린스턴에서 4년을 晝耕夜讀 아니 晝讀夜耕을 하며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낙산 중턱에 살던 소년 정운찬에게 얼마나 영광스런 순간이겠나? 아니지 그의 어머님이 더 했으리라. 아! 그런데... 어머님은 벌써 돌아가셨다. 임종을 하지 못한 것은 물론 한 동안 지난 뒤에야 알려왔으니 이역만리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나? 밤마다 촛불을 밝히고 서울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하니... 이 대목에 이르러 빼놓을 수 없는 人緣이 또 하나 있다. 인연이라기엔 더한 天生의 緣! 대학 4학년 때부터 마음을 뺏어간 여학생 최선주... 父先亡 苦學生으로 어렵사리 그 부모님으로부터 許婚을 받았으니 그 기쁨은 또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런 기쁨 뒤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법. 프린스턴에서의 볼품(어처구니) 없는 결혼식 뒤 苦學이 심해지고 晝讀夜耕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게다가 어린 신부를 데려와 어머님이 그러셨듯 베이비시터라는 삯일을 시켰으니... 그래도 고난 뒤엔 그보다 더 큰 기쁨이 기다리는 법 아니던가?

그는 컬럼비아대학 교수를 거쳐 1976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부름을 받고 두 해 지나 돌아왔다. 그로부터 31년 경제학자로 교수로 여론을 이끄는 지식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의 운은 점점 차올랐다. 그 사이 금융학회 경제학회 등 많은 학회를 이끌었고 4년 임기의 서울대학교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올곧은 가치관과 역사관 미래관을 공고히 확립해 나갔으리라. 교수하는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운찬이는 대학역사상 대학자율성을 가장 크게 높혔고 총장공관을 반으로 줄여 250여 가구의 교수아파트를 지었으며 대학발전기금도 현금만 1,600억원을 모은 보기 드물게 성공한 총장이었다 하니...  그의 삶에서 씨줄과 날줄이라 할 수 있는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시대가 부르는 인물’로 커나갔다는 말이다. 말이 좀 거시기한가?

2009년 9월, 그는 말도 많았던 청문회를 거쳐 제40대 대한민국 국무총리에 올랐다. 登極은 아니지만 소위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랐다는 말인데 일인과 만인 사이에 끼어있는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일까? 당장의 현안과 백년대계 사이에서도 많이 어려웠으리라. 의욕이 크다고 萬機親覽할 수 없는 법... 마침 현안이면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것 같은 큰 문제가 시간을 다투고 있었으니 태생적으로 정치 산물인 소위 ‘행정중심복합도시’ 원안이다. 원안의 원안이야 ‘수도이전안’이었지만 헌재의 판결로 폐기된 이후 기름차도 전기차도 아닌 어정쩡한 하이브리드(행정중심복합?) 자동차 같은 특화되지 않은 법안으로 바뀌어 대못을 박기 직전이 아니던가? 時急히 그래도 넉 달이나 걸려서 세종시 발전방안을 마련해 대안으로 제시했으니... 기억하건데 ‘교육과학중심의 경제도시’案이다. 그러나 정치는 욕심 사나운 포식동물과 같아 애써 만들어 놓은 수정안마저 금방 삼켜버렸다.

그런데 지금 보는 세종시는 어떠한가?  행정은 중심을 잃고 복합 기능이란 건 겉보기용이 아닌가? 앞으로 십수년간 비효율과 무리수를 감추거나 補修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뒤에나 모양새를 갖출 것 같은데... 그 때 가서 누군가 “봐라! 20여 년 전 위대한 선각자가 있어 아무도 생각 못한 지금의 세종시를 만들지 않았더냐?”고 떠들어댈지 모를 일이다. 이렇듯 그의 뜻은 대부분 정치에 휘둘리고 언론에 시달리다가 일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스스로 만인지중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유롭다. 휘둘리거나 시달릴 일 없다는 말이다.

III.  그의 현재

그가 대담을 마치는 자리에서 “내 지난 얘기 이 속에 다 있네”... 하며 내어준 책이 있다. 「가슴으로 승부하라」... 2007년에 自傳 에세이로 펴냈던 「가슴으로 생각하라」를 다듬고 덧붙인 5년 뒤 개정 증보판으로 ‘나’라는 1인칭으로 쓴 첫 번째 책이라는데 그 책 제목이 세상으로 나온 5년 사이에 ‘생각하라’에서 ‘승부하라’로 바뀐 연유가 있을 법하다. 혹시 ‘생각하는 사람’이 대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험한 세상 헛 물을 마시고 ‘승부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사회 참여란 생각만으로 되지 않고 으레 승부를 걸고 목표를 향해 싸워야만 얻어진다는 뜻일까?

그 책은 300쪽이 넘는 비교적 두꺼운 책으로 12절로 나뉘어 있는데 마지막 11절은 ‘봉사’ 12절은 ‘희망’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11절은 뜻 그대로 국무총리 시절의 이야기요 12절은 아마도 행정부 책임자로써 미처 못다한 일에 대한 아쉬움을 완곡히 표현한 말이 아닐까? 희망...

그의 동반성장연구소에서 그의 현재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현재란 먼 과거와 긴 미래 사이에 끼어있는 시간... 빨리도 지나가는 순간이다. 그러니 어찌 그의 현재를 길게 논하랴. 곧 지나가리니...

IV.  그의 미래

“크고 작은 나무를 함께 키워야 숲을 만들 수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정운찬이 동반성장을 말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인데 그 뜻이 깊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SNS에 퍼지고 있는 의미있는 글이 있어 나도 인용해 본다.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영국 끝에서 런던까지 빨리 가는 방법’이란? 퀴즈를 공모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1등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 
어느 미국교포의 글(생략하고 줄이고)도 가슴을 찌른다.
“한국에 와보니... 가정집 뿐 아니라 공중화장실에도 미국에서는 부자들만 쓰는 비데가 설치되어 있고 주차티켓을 뽑지 않고도 자동인식으로 주차장에 들어간다. 모든 대중교통은 카드 하나로 해결되고 버스정류장에 서있어도 자동으로 초고속 Wifi가 잡힌다. 그리고 몇분 뒤에 기다리는 버스가 오는지 정보가 뜨고... 미국에서 나름 부자동네에 살다온 나도 집 구석구석 럭셔리함에 놀라고 부러워하며 이 고급스러움을 며칠 뒤엔 잃는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국에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토로한다. 정치가 얼마나 헛짓을 하는지 아이들 교육시키기 얼마나 힘든지... 자신들이 지옥에 살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의료보험은 10배 싸고 치료비도 10배 싸게 느껴지는 이 곳에서...”

남과 비교하며 불행하고 억울해 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고 남 잘되는 걸 못 봐주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지 온갖 부정 불법을 저지르며 출세 성공하려 하고 남의 몫을 빼앗아야 내 몫이 커진다고 믿는 제로섬 신봉자들이 주역인 사회, 세상은 윗물부터 썩어 흘러 아랫물로 번지고 언론은 크고작은 나쁜 소식으로 가득하고, 세상이 온통 뒤집혀 있으니 지옥에 산다는 말 맞는 것 같은데... 정말 이 거 고칠 수 없는 병인가? 총리를 지낸 정운찬이 책략을 꺼내 들었다.

同•伴•成•長... 우리 사회의 亂麻를 푸는 방법이 어디 한 번의 快刀로 해결될 일이겠나? 엉킨 실을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하는지는 밝은 눈과 지혜 그리고 차근차근함이 필요할 노릇인데 그는 우리 사회의 ‘소득 양극화와 성장동력의 약화’ 등 뿌리에 깊이 든 병의 根治法으로 同伴成長策을 내세우며 앞장서고 있다. 

동반성장은 경제학자로서의 의무 그리고 전 국무총리로서의 책임이 따르는 그의 현재이며 또한 그의 미래로 한참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의 미래가 '내릴 수 없는 고약한 호랑이 등에 탄 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 동반성장이라는 기치를 들었다가 슬며시 내려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운찬아, 그렇다면 최선주 여사는 어떡하니? 65세 정년퇴임하기를 손꼽으며 기다렸을 텐데... 끝은 시작으로 이어지고 시작은 끝으로 이어지고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公人이 된 자네의 바깥 활동을 말하는 걸세. 봄에 꽃구경 가고 여름에 물놀이 가고 가을엔 단풍놀이 가고 겨울엔 눈꽃열차도 타보고 자네 좋아하는 ‘동반’ 두 글자가 들어간 여행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V.  마무리

동기와의 대담이 이번이 여섯 번째인데 글쓰기가 많이 어려웠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인물인데다 이력이 길고 그의 삶에 영향을 준 人緣이 많다보니 따라서 이야기꺼리가 많은데 어찌 그 이야기들을 작은 보따리에 다 담겠나? 얼버무리다가도 횡설수설로 길게 늘어놓기도 하고 모른 척 한 십년 그냥 넘어가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그래도 글이 일없이 길다.

그런데 여기서 어찌 글머리에 올렸던 중요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겠나?
“雲燦... 그의 부모님은 무슨 바람을 그의 이름에 담으셨을까?”
구름이 찬란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볼 것이다 라는 바람을 은유하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운은 아직도 차오르고 있다?

2016년 7월

(참석자 : 정운찬 그리고 고승희, 박선원, 최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