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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섯 살 때 부산으로 피난 간 우리 가족은 천변동네에 살았다.

동네공장은 이따금씩 활동사진을 마당에서 상영해 주민들의 고단한 세월을 위로했다.

그때마다 두 형들은 나를 떼놓고 슬며시 가려했지만 울며불며 물귀신처럼 따라붙는 막내를

결국은 데려가야 했고 역시나 도중에 잠든 나는 업혀 돌아오곤 했었다.

동네 천막교회에 가면 얇은 성경을 나눠주었다. 장난감 없던 시절의 내 또래들은 그걸 딱지쯤으로 여겨

애지중지 챙겨들고 누가 더 많이 모았나 겨루곤 했다.

피난시절 기억의 끄트머리는 서울행 기차.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던 사과궤짝 좌석의 기차는 깨진 창문을 군용 우비로 막고 칙칙폭폭 달렸다.

굴을 지날 때면 굉음과 매캐한 연기에 귀와 코를 막아야했고 콧구멍은 검댕이로 시커메졌다.

새벽에 떠난 기차는 역마다 서고 역이 아닌 곳에도 무시로 서면서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한강철교로 들어섰다.

찢어져 펄럭이는 판초우비 사이로 우당퉁탕 창문을 스치던 시커먼 괴물 같은 쇠기둥들이 서울의 첫 인상이었다.

 

우리 식구는 혜화동에 둥지를 틀었다.

이사 간 집 처마로 삐죽 내민 녹슨 군용대검을 몰래 챙겼다 압수당한 나는 동네 꼬마들과 보물탐사에 나섰다.

그때 찾은 탄피로 만든 호각이 내 장난감 1호였다.

혜화동 로터리의 성당에는 보트 그네가 있어 툭하면 우르르 몰려갔다.

늘 비어있던 그 놀이터 옆 인기척 드문 담장 안에는 수녀님들이 산다고 했다.

그곳은 갈멜 수녀원이었고 그 성당 사제가 훗날의 추기경, 김수환 신부였다고 들었다.

 

수돗물 나오는 시간이면 양동이를 챙겨 공동수도 앞에 길게 늘어서는 것은 아이들 몫이었다.

당연히 북새통이 되고 새치기도 나타난다. 그럴 때면 골목대장 진국이가 나선다.

“쟤네 엄마 아프시잖아.”

따위 이유를 주워섬기며 유독 여자애들만 역성드는 녀석이 우린 눈꼴시었다.

하지만 누구도 덩치 큰 6학년의 카리스마에 도전할 용기는 없었다.

학교 건물이 미군 막사로 징발된 이웃학교 효제는 우리와 교사를 함께 사용했다. 그래서

한 교정의 두 학교 아이들은 툭하면 대결을 벌였다.

“효제, 효제, 거으지떼들아, 까앙통을 옆에 차고 혜화학교로..., 헤이!”

놀려대면 녀석들은 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렇다. 그 가난한 세월에도 우린 결코 주눅 따위는 들지 않았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안국동까지 걸어 다녔다. 종묘 쪽 원남동 골목은 통학골이다. 통학골?

옛날에도 이 길로 학교 다녔나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통내의 넒은 골목」이란다.

등교 길은 원남동에서 동쪽 돈화문으로 이어진다. 안국동에는 스님들이 많았다.

하루는 룸비니 서클 강사로 오신 키 크고 훤칠한 스님에게 좌선을 지도받기도 했다.

그분이 훗날의 조계종정 청담스님이셨다.

하교 길에 돈화문 앞을 지나다보면 사파리 헬멧의 아저씨에게 자주 잡힌다.

“그놈 자알 생겼다. 몇 반이냐?” 그리곤 볼 살을 한 번씩 콱 집혀야 방면된다. 원불교 포교사라던 그분은

돈화문 앞 광장에 앉아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이 길은 나라 잃으면 무슨 꼴을 당하는가 하는 본보기야. 합방되자마자 창경궁은 원으로 격하됐지.

임금님 다니시는 동네라 순라巡兩 동이던 이름도 원남동으로 바뀌고...

신작로를 핑계로 원래 하나였던 창경궁과 종묘를 썩둑 잘라 나누어 버렸지. 그게 바로 이 길이야.

왜 그랬는지 아니?“

하나씩 얻은 아이스케키를 열심히 핥던 우리는 제비새끼들처럼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아아--뇨.”

늘 장난스럽던 아저씨의 표정은 어느새 비감해져 있었다.

“그건 조선의 풍수와 관련이 있었다. 경복궁의 주산 북악은 인왕산을 우백호,

창덕궁, 창경궁, 종묘로 이어진 구릉을 좌청룡으로 삼았지.

창경궁을 중심으로 창덕궁, 종묘는 원래 한 덩어리였어.

그런데 종묘로 이어진 흐름을 끊고 좌우 날개의 대칭을 망가뜨린 거야.

한반도가 일본열도를 향해 내민 대륙의 비수라 떠벌리던 왜놈들다운 작태지.

거기다 한술 더 떠 근엄해야 할 왕궁을 아예 놀이터로 만들었어.

숱한 전각을 헐어낸 자리에 식물원, 박물관을 짓고 일식 연못을 파 물고기를 넣고

수천그루의 벚꽃을 심더니 나중엔 밤 벚꽃놀이를 핑계로 장바닥을 벌였지.

바로 옆이 황제의 거처 비원(창덕궁)이니 이건 노골적으로 황실을 욕보이자는 심보였지“

포교사 아저씨의 어조는 점차 격해져갔다.

“창경궁 내원에는 돌을 깔아 디딜 자리를 만든 길이 있다.

보법연습이 될 위치에 돌을 박은 길이지.

그 돌을 밟고 걸으면 절로 가슴이 펴지고 발가락이 밖으로 향하는 우아한 팔자걸음이 된다.

왕손들은 여기서 걸음걸이를 배웠다고 해.

이토록 깊은 배려가 구석구석 배어있는 유서 깊은 왕궁을 한낱 놀이터로 만든 게야.

인석들아, 그런 꼴 또 안 보려면 공부 열심히 해.“

혜화동에서 안국동에 이르는 길에는 언제나 우리 개구쟁이들을 지켜보던 어른들이 있었다.

독립한 조국의 첫 세대를 만감 어린 얼굴로 묵묵히 바라보는 노인들은

당시 서울거리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그 기대어린 시선 속에서 자란 우리 세대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다.

이제는 안다.

그 오롯한 공은 그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를 지켜보며 무언의 격려를 보내주던 그 분들의 몫임을.

고등학생이 되자 검도부에 들어갔다. 무사 차림으로 죽도를 든 모양새가 근사해서였다.

이따금씩 얼굴만 비치는 친구도 여럿 있었지만 고정멤버는 김성기, 이준희, 유명건, 장명국

그리고 나까지 5명이었다.

김성기 등 세 명은 중학교 시절부터 배운 처지라 실력이 뛰어났다.

생 초짜는 이준희와 나 뿐.

대련에서의 공격점은 머리, 허리, 손목, 이렇게 세군데다.

허리는 대나무 호구로 보호되지만 그 아래는 솜을 두어 누빈 천을 치마처럼 두른다.

그래봤자 헝겊이니 맞으면 제법 아프기 마련. 아무래도 대나무만은 못했다.

허리를 겨냥한다 해서 맞는 부분이 꼭 옆구리만은 아니다.

대련하다보면 배도 맞기 마련.

문제는 그 아래를 맞는 경우다. 배아래 부위면 그게 어디겠는가?

키가 작아서인지 이준희는 걸핏하면 그 부분을 때리곤 했다.

한 방 맞으면 깡충깡충 뛸 만큼 그 끝(?)이 짜릿하게 아팠다.

때로는 우정 찾아온 대학생 선배들이 지도대련을 해주었다.

오늘의 선배는 서울대 검도부 주장 박석도 3단. 작은 키의 당찬 실력파다.

아잇-싸, 검은 도복이 내 손목을 치며 흐르듯 지나간다. 아프다. 다부지게도 맞았다.

다시! 아픈 손목으로 쥔 죽도를 중단세로 겨눈다. 상단세로 높이 치켜든 선배.

나는 키 작은 선배의 머리를 노린다. 하지만 그쪽에는 눈을 주지 않는다. 상대는 눈치 3단이니까.

이윽고 도약 직전의 기세가 발뒤꿈치에서 죽도 끝으로 이어진다. 지금!

내딛은 발이 체육관 마루를 타앙 구르는 순간 죽도 끝이 따악 머리에 꽂힌다. 카아앗,

높다란 체육관 천정에 메아리치는 기합. 돌격의 여세로 바람처럼 대여섯 걸음을 내닫는다.

돌아보니 선배는 그냥 제 자리에 있다. 한 판.

다아~시! 맞댄 죽도를 탁 쳐본다. 깐에는 젖혀볼 요량이지만 꿈쩍도 않는다. 철봉 같다.

쏟아지는 역공. 머리, 허리, 머리, 손목, 또 손목! 이런이런..., 도무지 막아지지가 않는다.

물러서면 자석을 만난 쇠못처럼 찰싹 달라붙는다.

“공격해, 공격, 공격.” 밀면 되려 밀린다. 다급하다. 마구 휘두른다.

하지만 죽도는 튕겨나고 마구 두들겨 맞는다. “움직여! 뛰란 말이야.” 눈앞이 어지럽다.

“여기까지.” 스윽 올라가다 중단에 탁 멈추는 선배의 죽도. 대련 끝.

마루가 돈다. 반짝이도 보인다. 닦아도 끝없이 솟는 땀. 이윽고 빙빙 돌던 농구대가 멈춘다.

손뼉을 쳐 부원들을 모으는 반장. 연습 끝. 마주 정렬해 선배님께 절한다.

호구를 벗자마자 수돗가로 냅다 달린 우리는 쏟아지는 물살에 땀에 젖은 머리통부터 디민다.

도복을 훌렁 벗고 물을 뒤집어쓴다. 부르르 떨린다.

땀에 젖은 도복을 빨고 계단에 철퍼덕 앉는다. 벌거숭이 소년들의 풋풋한 향이 감돈다.

음악당 옆 고목나무 위 뭉게구름이 서서히 분홍으로 물들더니 이내 타오르며

선홍빛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서울에서 검도부가 있는 고등학교는 모두 세 군데였다. 성남, 용산, 그리고 우리.

이따금씩 벌어지는 시합에서 우승은 늘 성남 차지였고 2, 3등은 용산과 우리가 번갈아 하곤 했다.

성남은 신입생 전원을 유도부, 검도부로 반씩 나눈다. 그래서 한 학년에 240명씩, 700여명이 검도를 하는

대단한 학교였다. 출전선수는 이중에서 선발한 정예 5명.

반면에 우리는 학년마다 4~5명씩, 모두 20명 남짓. 거기서 수험생인 3학년과 초짜를 빼면

시합팀 5명 채우기도 버거웠다.

2년 정도 배운 실력이면 초단쯤이 정상이다. 그런데 성남에는 2단, 3단이 즐비했다.

학교에서 이런 사정을 아는 건 체육담당 윤 선생님뿐이었다.

꼴찌를 하고 돌아온 우리에게 누군가가 물으면 “3등 했습니다.“ 할 밖에.

그러면 “오, 잘했네.” 한다. 썩 민망스러웠다.

여름방학이면 비원에 있는 고풍스러운 전각(세심관)에서 열리는 수련회에 참가했다.

서울지역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참가하는 행사였다.

요즘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문화재급 전각에서 방학 내내 운동하는 호사를 누린 것이다.

아마도 고위층에 인연이 많던 사범님들 덕분으로 짐작된다.

우리들 중 발군의 실력자는 김성기.

세 학교가 혼전을 벌이는 서울지역 개인전에서 준우승도 했었다.

충북대 국문학과 교수로 정년퇴직한 그는 고교시절에 이미 삼국지연의를 원문으로 읽던

대단한 친구였다. 지금은 4단, 청주의 대한검도회 지부장이다.

부인도 검도에 입문하셨다는데 기합을 지르며 남편을 죽도로 실컷 패고 나면

스트레스가 싹 풀린다며 좋아한다고...(남편분 말씀.)

 어느 날 대련 중 죽도로 머리를 슬쩍 쳤더니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더란다.

마치 묵직한 쇠몽둥이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는 거다.

하지만 김성기 4단 왈

“절대로 세게 치지 않았다. 그냥 죽도를 던지듯 슬쩍 때렸었는데...” 

 으음...? 

“우우...” 목을 울리는 기합과 함께 줄기찬 공격으로 매섭게 상대를 몰아세우곤 하던 유명건.

검사 시절에도 그런 기세였다면 아마 무서운 검사였을 듯...

지금은 3단. 오랜 검사생활을 마치고 서초동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있다.

건축사로 일하는 이준희, 건설현장에서 멋모르고 대들다 배 아랫부분을

한방 얻어맞고 제자리 뜀께나 뛴 노가다들, 제법 있지 않았을까?

바둑을 잘 두던(3급?) 장명국은 멋 부리는 사무라이처럼 약간 비스듬하던 대련자세가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