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산책 18> - 맑은 밤의 흥취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날씨 따라 정신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절로 책을 가까이 하고 싶기도 하고, 무언가 좀 생각에 잠겨 보고도 싶어진다.

 宋나라 소옹(邵雍1011-1077)이 ‘맑은 밤’의 흥취를 읊조린 五言絶句 <청야음(淸夜吟)>을 소개한다.

   月到天心處(월도천심처)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고

   風來水面時(풍래수면시) 바람이 수면 위로 불어 올 때

   一般淸意味(일반청의미) 이 같은 맑은 의미를

   料得少人知(요득소인지) 아는 이 적음을 새삼 알겠구나.

       * ‘天心處’는 ‘하늘의 한가운데’이다. ‘一般’은 ‘같다’는 뜻이다. ‘料得’은 새삼스럽게 헤아린다는 뜻이다. ‘少人知’는 ‘아는 사람이 적다’는 뜻이다.

 이 詩를 지은 소옹은 字를 요부(堯夫)라 하였고, 號는 안락선생(安樂先生) 또는 이천옹(伊川翁)이라 하였다. 사후에 강절(康節)이라는 시호(諡號)가 주어졌다. 소옹은 본래 道家에 전심하였으나 易經을 공부하다가 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마다하고 낙양(洛陽) 교외의 초라한 은둔처에서 친구들과 교유하며 명상(冥想)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를 지어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數理로 해석하였고, 占卜에도 능통하였다. 스스로 깨우쳐 自得한 것이 많았고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즐겨 시를 지었고, 그 가운데 철학사상을 담고자 하였다. 詩集으로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20권이 있어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詩는 담백한 맛이 나는 禪味 흐르는 시가 많다고 評해진다. 그러나 그는 시인으로 보다는 유학자로 더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宋代의 일반 유학자들과는 달리 孔子의 後學으로 자처하면서도 老莊을 배척하지 않았다.

 위에 소개한 <淸夜吟>은 無欲自足하는 達觀의 경지에 이른 시인의 마음을 함께 느끼게 하는 간결한 설리시(說理詩)이다. 시인은 아마도 밤늦도록 글을 읽다가 달이 中天에 이르는 한밤중이 되어 잠시 뜰에 나선 듯하다. 달빛이 교교하고 수면 위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사위(四圍)가 고요한 밤에 시인은 마치 자연스럽게 運行되는 우주의 숨소리를 듣는 것 같다. 그리고 우주 運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편승하여 우주와 일체가 되어 보는 것이다. 번잡한 낮에는 생각지 못하던 경지이다.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詩의 ‘言外意’(詩語에 言表되지 않은 함축된 의미. <한시산책 8> 참조)를 이야기하면서, 낮 동안에는 곁에 놓여 있는 난초 향기를 느끼지 못하다가 조용한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난초의 그윽한 향기를 깨달았다는 비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좀 생뚱맞지만 현대시인 조병화의 <가을비>라는 詩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져 참고로 다음에 보인다.

   가을비는 철학이옵니다

    밤 두시

    그 철학을 듣고 있습니다

    지구의 심장으로 침전하면서

 이 시에서 조병화 시인이 ‘철학’이라 한 것도 ‘이 세상 일체 存在의 철학’이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王維가 ‘詩畵一致’라고 말한 바도 있듯이, 唐詩에서는 ‘시가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시’라는 면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宋나라의 시인들은 <청야음>에서 보듯이 詩에 ‘理致’를 함께 담고자 하였다. 대체로 唐詩에서는 자연의 情趣와 관련된 ‘모양’에 중점을 두었다면, 宋詩에서는, 특히 성리학자들의 시에서는 자연의 興趣와 관련한 ‘이치(理致)’로 중점이 옮겨졌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도 宋代의 유학자들처럼 詩에 이치를 담고자 하였다.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지은 오언절구 <경렴정(景濂亭)>을 보인다.

   山立祗祗色(산립지지색) 산은 경건한 빛으로 서 있고

   溪行亹亹聲(계행미미성) 시내는 끊임없이 소리 내어 흐르네.

   幽人心有會(유인심유회) 조용히 사는 이 마음에 와 닿는 바 있어

   半夜倚高亭(반야의고정) 한밤중 높은 정자에 기대어 있네.

       * ‘祗祗(지지)’는 공경하는 모습, 또는 경건한 모습이다. ‘亹亹(미미)’는 꾸준히 힘쓰는 모습이다. ‘幽人’은 조용히 은거하는 사람이다. 여기서는 당시 풍기 군수이던 주세붕이 자신을 가리킨 것이니 隱者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은자처럼 世事에 초연한 마음을 가졌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시인은 한밤중 대하는 山, 川이 시인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우주의 원리가 적용되는 가운데 있으며 또한 우주의 경건한 운행과 함께 하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일종의 법열(法悅) 같은 것을 느낀다. 우주의 통일성 밑바닥에 깔려 있는 원리를 우주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점에서 소옹(邵雍)과 같은 맥락이다.

 주세붕은 1542년 풍기郡守로 있으면서 고을을 끼고 흐르는 죽계(竹溪) 가에 고려 말의 儒賢인 안향(安珦1243-1306)의 祠宇를 세우고 學舍를 지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550년에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上奏하여 여기에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자 공인된 私學이 시작되었다.

 주세붕은 또한 이 서원의 한쪽 구석 죽계를 내려다보는 곳에 정자를 지어 ‘景濂亭(경렴정)’이라 이름 하였다. 竹溪를 宋나라 주돈이(周敦頤.1017-1073)가 은거하던 곳의 염계(濂溪)에 비의(比擬)하고 그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景濂’이라고 정자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景’은 ‘사모한다’는 뜻이다.

 주돈이(周敦頤.1017-1073)는 정호(程顥), 정이(程頤), 소옹(邵雍), 장재(張載)와 더불어 송나라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北宋五子’로 일컫는다. 주돈이는 晩年에 여산(廬山) 연화봉(蓮花峰) 기슭의 냇가에 은거하면서 그 내를 ‘염계(濂溪)’라 새로 고쳐 이름하고 또한 自號로 삼았던 사람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후임 풍기군수가 된 퇴계 이황은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발전시켰고, 또한 주세붕이 ‘경렴정’을 읊은 詩에 次韻(같은 韻을 따라서 시를 지음)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퇴계의 차운시를 다음에 보인다.

   草有一般意(초유일반의) 풀도 사람의 뜻과 일반이고

   溪含不盡聲(계함부진성) 시내에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로다.

   遊人如未信(유인여미신) 노니는 사람들 이를 믿지 못한다면

   蕭洒一虛亭(소쇄일허정) 씻은 듯 깨끗한 빈 정자에 올라나 보게.

        *‘蕭洒’는 한적하고 씻어낸 듯 깨끗한 모양이다.

 이 시 또한 道學者的인 관심을 직접 言表에 드러내지 않고서도 자연의 理를 청신(淸新)하게 읊조린 작품이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시의 높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퇴계가 경렴정을 대하는 태도는 자기 속에 내재하는 道를 통하여 자연의 理를 바라보는 바로 그것이다.

 조선의 詩비평가인 홍만종(洪萬宗1643-1725)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퇴계 등 성리학자들의 詩를 두고, “아, 이와 같은 여러 賢人들의 시는 詩語를 만드는 것이 천연스럽고 각기 妙處를 다하였으니 성정의 바름이 시에 구현된 것임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噫 此等諸賢之詩 作語天然 各盡妙處 其性情之正得於詩者 於此可見矣)”고 하였다.

 퇴계 이황의 시를 두고, “겉으로는 메마르지만 속으로 살지다.”라는 世評이 전해진다. 이를 이제 칠십 줄에 드는 우리 친구들 인생에 견주어 한번 되새겨 볼 만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