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향연(饗宴)”

올해 우리의 기억 속에서 가을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이번 여름에는 늦장마로 그나마 큰 더위는 없었지만, 매미 소리가 뀌뚜라미 소리로 바뀌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던 9월을 맞았으면서도, 때늦은 태풍으로 또는 코로나마이러스로, 제대로 가을이 왔음을 느끼지도 못했으나, 거의 한 달이 보내고 들과 밭에는 오곡백과가 익어가던 추석이 되어서야 겨우 가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매년 맞는 한가위지만, ‘오곡백과(五穀百果)의 향연(饗宴)’으로 표현되는 한가위는 역시 우리의 가을 축제의 시발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본격적인 가을은 나무 잎사귀의 색깔의 변화로부터 감지되었다. 나무 잎사귀들이 초록빛에서 노란빛과 붉은빛의 단풍 색으로 곱게 변해 가는 과정은 변화하는 가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단풍은 기온이 낮은,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진행된다. 지난 10월에는 전국 각지의 산들이 모두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거의 뒤덮여 있었으니 단풍만큼 가을의 정취를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풍의 정취는 역시 그 색의 변화에서 제일 잘 느껴진다. 10월에 전국의 산들을 뒤덮을 만큼 현란한 전국의 단풍의 잔치는 ‘색깔(또는 빛깔)의 향연’이라 할 만했다.

그러다 11월에 들어서면서 전국의 아름다운 단풍들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단풍은 점차 고엽(枯葉)으로 변해 가고 고엽은 또 낙엽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그것이다. 가을이 점차 짙어가면서 노랗고 빨간 단풍은 점차 말라서 고엽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조용히 진행된다. 그리고 그 고엽들은 물기가 말라가면서 필연적으로 그 생명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나무로부터 분리되어 땅에 떨어진다. 그 떨어진 고엽은 흔히 낙엽으로 불린다. 단풍과 고엽, 그리고 낙엽, 모두가 가을이 불러온 잎사귀의 변화 과정이지만, 낙엽이 우리에게 주는 정취는 단풍의 정취와는 확연히 다른 무엇이 있다.

높은 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도심으로 내려오는 단풍의 생성은 움직임이 없이도 가능한 靜的인 변화인데 반해 낙엽의 생성은 반드시 움직임을 동반하는 動的 변화이다. 주변이 조용할 때엔 납엽은 중력에 의해 수직 강하한다. 그러나 여기에 바람이 가세하면 낙엽은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땅에 떨어진다. 바람은 정도와 방향에 따라 낙엽들의 궤적은 자유분방한 모습을 연출한다. 이렇게 바람으로 인해 촉발되어지는 낙엽의 움직임은 그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동반하는 소리 또한 변화무쌍하다.

단풍이 수명을 다하여 고엽이 되고 그 고엽이 땅에 떨어져 낙엽이 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변화무쌍한 움직임과 소리를 만드는 動因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바람이다. 바람이 없으면 고엽은 중력에 의해 수직으로 강하하여 낙엽이 되어 쌓일 뿐이다. 그런데 바람은 조용히 불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게, 또 때로는 휘몰아치기도 하여 그것이 고엽으로 가득찬 나무에 부러닥칠 때에는 그 고엽들이 나무에서 분리되어 땅에 떨어질 때까지의 그 고엽들의 움직임과 여기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매번 달라지는 독창적인 교향악을 연상케 한다. 바람은 고엽과 일체가 되어 아름다운 움직임과 소리를 연출한다. 그래서 고엽과 바람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고엽의 낙하 소리는 가히 “소리의 향연”이라고 할 만하다.

청계산 옛골 주변 계곡의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토요 등산반’ 친구들 간의 만남의 장소로 쓰이는 경암정(慶岩亭)이라고 하는 하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다. 지난 토요일, 별 다른 준비 없이 시작해서 청계산 개울길을 따라 발걸음이 경암정에까지 이르러, 그곳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으스스스~후두두두둑’ 하며 무엇이 무언가 휘돌아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처음엔 가벼운 비가 아닌가 했는데, 곧바로 그건 비가 아니고 바람이 주위의 나무의 고엽들을 휘돌아 흔들었다가 땅으로 뿌려주는 소리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런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소리는 저윽이 내 詩的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아~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가 이렇게 심금을 울릴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네...!”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는 이런 신비한 소리를 시인들은 어떻게 표현하였을까 궁리하다가 400여년 전 조선 시대의 사대부 선비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표현한 한 풍류 시들을 만나게 되었다.

조선 조 효종 때 문신, 학자였던 홍만종 [洪萬宗, 1643 ~ 1725] 이 남긴 명엽지해 [蓂葉志諧] 라는 책에 소리의 품격을 따지는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 있다. 조선 선조 시대에 우연히 어느 관리의 환송 잔치에 참석한 정철과 유성룡, 이항복, 심희수 그리고 이정구 등 학문과 직위가 쟁쟁한 다섯 대신들이 한창 잔을 돌리면서 흥을 돋우다가 ‘들려오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시제를 가지고 시 한 구절씩 읊어 흥을 돋우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이 때 그들이 읊은 시들은 다음과 같다.

淸宵朗月 樓頭遏雲聲 청소낭월 누두알운성 ………………鄭澈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 

滿山紅樹 風前遠岫聲 만산홍수 풍전원수성 ………………沈喜壽 

온 산 가득 찬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을 스쳐서 불어 가는 바람 소리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효창수여 소조주적성 ………………柳成龍 

새벽 창 잠결에 들리는, 작은 통에 아내가 술을 거르는 그 즐거운 소리

山間草堂才子詠詩聲 산간초당 재자영시성 ……………..…李廷龜 

산골 마을 초당에서 도련님의 시 읊는 소리

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동방양소 가인해군성 ………….…李恒福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과연 어느 것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일까 하는 것은 각자의 심미적인 주관에 따라 다를 것이므로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지만, 요즈음과 같이 풍류를 찾기 어려운 시대에 과거 조선 시대의 선비적 풍류를 원용해 본다면, 위에서 말한 낙엽과 바람이 어우러져 나는 그 소리는 (一松) 심희수 [沈喜壽, 1548 ~ 1622] (조선 선조, 광해 조의 문신, 이조판서, 대제학, 좌의정 역임)가 그의 시에서 노래한,

滿山紅樹 風前遠岫聲(만산홍수 풍전원수성)

-온 산 가득 찬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을 스쳐서 불어 가는 바람 소리-

가 아니었을까?

서초동 법원 별관 모퉁이를 돌아 '미도 아파트' 입구로 가는 작은 거리에는 진작부터 낙엽이 쌓였으나 그동안 누가 쓸지도 않아 낙엽이 소복히 쌓여 있다. 이 거리를 지나  ‘미도 아파트’를 통해 서리풀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나의 산책 루트다.  참나무 쉼터를 찍고 다시 누에다리를 건너 몽마르뜨르 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어느덧 낙엽들이 질펀하게 깔려 있다. 그것들을 즈려밟고 누에다리를 건너 만나게 되는 몽마르뜨르 공원은 작은 낙엽 동산이다. 이 산책 루트에서 낙엽을 밟고 지나갈 때 듣는 소리는 연인이 들려주는 속삭임과도 같다.

우리 집 아파트 주변, 그리고 아파트 사잇길에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떡갈나무, 은행나무들도 예외가 아니다. 잎들은 점참 고엽으로 변해갔고 또 그 아래에는 지난 달부터 조금씩 낙엽이 쌓이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더욱 많아지는 고엽들과 낙엽들을 오며 가며 보는 것이 가을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난 목요일 밤비가 내린 이후 이 고엽들이 떨어져 낙엽이 된 비율은 현저하게 증가했다. 연이어 며칠 더 비가 내리면서 이제 그동안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단풍과 낙엽도 그 수명을 다해 가고 있다. 얼마 안 있어, 나뭇가지에 붙었던 고엽들이 모두 떨어지면 2020년도 가을도 어느덧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2020년 11월 20일     한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