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2020.12.4) 남규의 아들 원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오늘 별세하셨읍니다." 

   순간 덜컥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무슨 안도감 같은 것도 느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5년을 끌어 온 악몽의 세월 - 대체 이 무슨 형벌이란 말인가? 몇년씩 병상에 있는 사람 개개인에게는 자기가 겪는 고통이 어느 누구의 것보다 절실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남의 괴로움에 차등을 두어 말할 것이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그 모든 병 중에서 걸렸다는 병이 어찌 이리도 흉악하단 말인가? 먹고 마셔야 하는 입도 근육을 움직이지 못해 가슴을 뚫어 목숨을 이어나가야 하고 몸은 커녕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인데 정신은 말짱하고 청각은 또렷하니 이것이 대체 어느 존재의 조롱이란 말인가? 

   

사탄이 만들어 퍼뜨린 침방울이 2020년을 전 인류에게 암흑의 나날로 만들었고 그 와중에 그것을 반기는 사탄의 제자들로 인해 우리는 어두운 시기를 빨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한심한 해의 마지막 달은 남규에게는 평소의 고통에 마지막 고통을 더해 준 셈이다. 년초부터 요양원 방문도 마음대로 안되고 그나마 다른 환자들이 하는 화상 대화도 할 수 없는 고독한 괴로움이 그가 이 세상을 작별하는데 일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시간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나 보다.

  빈소에서 외아들의 손을 잡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말하면서 속으로 이제 자네 집안을 누르는 불행의 그림자는 자네 아버지가 걷어 갔네 라고 덧붙였다. 부디 그러하기를. 

   둘도 없는 친구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친구로 부를 사람이 둘이야 더 되겠지만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남규는 나와 무슨 동업을 한 적도 없고 줄기차게 왕래한 사이도 아니건만 그는 분명 내게는 마음 속에서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구와 친해진다는 것이 꼭 어느 물리적 인연 때문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는 나와 학교에서 8년을 한반에서 공부했으니 특별한 인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1학년 부터 5학년까지 반을 바꾸지 않다가 6학년이 되면 비로소 학생을 섞는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남규는 국민학교 6년 동안을 나와 한반에 있었다. 다른 학교 다니다가 중도에 전학온 친구도 있고 6학년 때 다른 반으로 간 친구들도 있지만 남규는 나와 국민학교 입학식을 함께 한 친구다. 물론 남규처럼 입학식을 함께하고 6학년까지 한 반에 있었던 친구들도 꽤 많지만 중학교 3년 중 2년을 또 한 반에서 공부한 경우는 남규밖에는 없다. 8년을 한반에서 공부한 사람은 아마 전국에서 나와 남규 밖애는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남규는 즐겁지 않았던중학입시 공부를 거쳐 경기중학에 들어왔으니까 공부는 잘 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1, 2위를 다투지도 않았고 무슨 예능이나 운동으로 두드러지지도 않았으며 하다못해 말썽도 부리지 않아 한마디로 튀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친구였다. 어렸을 때도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처럼 말수가 적고 그저 흐뭇한 웃음을 웃는 것이 특징이었다.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눈에 띄는 사람들을 우리는 가끔 본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독특한 매력이 있는 법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남규에게 끌린 것도 그런 면이 아닐까 하고 돌이텨 생각해 본다. 

   남규의 집은 명륜동이었고 나는 돈암동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원래 일제가 창경원에 놀이객을 유치하기 위해 과거에 깔아놓은 전차를 함께 타고 다녔다. 학교에서 방과 후 내게 일을 시키는 적이 많아 매일 그럴 수는 없었지만 꽤 오랜 세월 남규와 함께 전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돈암동 종점까지 가야 하는 내게는 지루하지 않고 무척 좋았다.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주로 내가 말을 많이 하고 남규는 듣는 입장이었던 것 같다. 한번은 내가 탐정소설에서 배웠다고 하면서 암호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 이튿날 부터 한동안 우리는 교실에서 암호 쪽지를 교환하는 재미를 누렸다. 물론 친구들 몰래 한 짓이었지만 또한 친구들에게 우월감을 갖기 위해 암호 교환하는 우리 모습을 슬쩍 드러내기도 했다. 

    남규는 운동선수로 뽑혀나간 적은 없지만 스스로 육상선수라고 불렀을 만큼 달음박질을 잘 했다. 가끔 그는 자기가 내려ㅑ 할 명륜동 정류장 보다 하나 전인 원남동 정류장에서 내리는 수가 있었다. 그가 잘 달린다는 사실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 전차의 옆에서 함께 달리려는 것이다. 아무리 길에 교통순경이 없고 또 차도에 소달구지가 지나가던 시절이긴 했지만 국민학교 아이가 가방을 들고 전차를 따라오는 것은 과연 그의 달리기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내가 전차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노라면 한동안 그렇게 따라오던 남규는 창문을 탁탁 치고는 멀어져 가곤 했다. 그런 친구가 결국 전신 마비가 되다니! 

    중학교에 들어와서 그와 나와는 다른 반이 되었으므로 그 때 어쩌면 남규와 멀어졌을 수도 있었는데 반갑게도 그는 2학년 때 나와 다시 한 반이 되었다. 그 당시 우리집은 돈암동에서 아버지의 직장과 가까운 옥인동으로 이사왔기 때문에 학교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었고 그래서 남규는 전보다는 우리집에 자주 놀러올 수 있었다.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변하던 시기의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팝송에 심취하게 되었고 뜻은 잘 몰라도 영어 가사를 따라 부르곤 했다. 우리는 미군 방송 AFKN에서 최신 미국 팝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Top Twenty Show를 빼놓지 않고 들었는데 학교에서 걸어서 20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어 4시에 수업이 끝나면 5시에 시작되는 방송을 듣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남규도 그 방송을 거의 빠짐없이 듣는 것 같았다. 여전히 명륜동에 살았으므로 그가 창덕궁, 창경궁 담을을 따라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한번은 남규와 함께 계동 뒷산으로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남규네가 사는 성균관대 뒷쪽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어제의 방송을 듣고 이튿날 만난 우리는 인기 순위가 변한 것, 새로운 곡이 스무 곡에 들어온 것 등을 말하며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하고 잘 모르는 가사를 더듬기도 했다. 어느 날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이냐고 그가 묻기에 Shirelles의 Baby, it's you라고 했더니 "엇, 나도 그걸 제일 좋아하는데!" 하며 특유의 흐뭇한 웃음을 웃던 것이 기억난다.

    학교 다닐 때 그는 튀지 않는 존재였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본 나는 그가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자면 타고난 공돌이였다. 국민학교 때 그가 철사를 구부려 척척 옷걸이를 만드는 것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팝송에 심취한 그는 레코드 플래이어를 만들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국민학교 때 보다 훨씬 고급의 지식으로 무장한 그는 자기 방을 공장 작없실로 만들었다. 어느 시장의 어느 고물상를 뒤져 구해 왔는지 모를 부속품을 조작하는 동안 그의 작푸미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내게는 몹시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우리는 2학년 때 새로 사귄 오세룡과 자주 만났다. 교동국민학교 출신인 그는 우리 둘과 성격도 맞았지만 그 또한 타고난 공돌이라서 남규는 그 방면의 대화 상대자를 만난 셈인데 반갑게도 3학년으로 올라갈 때 세룡도 우리와 다시 한 반이 되었다. 그는 남규와는 달리 오디오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전기공학적 지식에 상당히 들어가야 하는 다른 분야를 파고 드는 것 같았다. 남규와 세룡이 서로 소위 전문적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곁에서 저게 죽인다는 소린지 살린다는 소린지 못 알아듣는 채 그저 뻥뻥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두 친구는 이렇게 학교공부와는 거리가 먼 작업에 몰두하다보니 고교 입시에 사이좋게 나란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경기중학을 나왔으니 반드시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의식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입시에 떨어지고 나서 나를 쳐다보며 실실 웃던 두 친구는 사이좋게 다른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고보니 남규는 평소에 엘리티즘이 전혀 없던 친구다. 나는 그동안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남규의 비 엘리티즘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남규는 경기 동창 수첩에 자기 이름이 올라있는 것을 몹시 불편해했다.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다른 친구들의 이름도 몽땅 올라있었더라면 그는 다소 마음 편해 했을지 모른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나 자신 엘리티즘을 몹시 혐오한다. 이미 오래 전 부터 세계를 지배하려는 공포의 엘리티즘이 사탄의 그 더러운 침방울 처럼 역시 사탄의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믿는 터이지만 나는 가치없는 엘리티즘의 강요된 삶을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경기중학을 졸업한 나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와는 다른 교복을 입은 두 친구를 그 후 몇 번 만났었다. 그런데 일차적으로는 학교가 달랐었기 때문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내 게으름이 원인일 것이다. 친하게 지내던 그들과 연락이 점점 드물어지고 마침내 서로의 소식은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완전히 잊혀지지 않을 운명인지 5, 6년 후 나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고려대 학생인 세룡을 만났다. 우리가 만난 곳이 시내 중심가였고 그의 집이 거기서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오래간만에 어려서 자주 놀러가던 그의 집으로 갔고 그의 어머니도 보았다. 내가 가면 으레 커피를 끓여주시던 그의 어머니가 이번에도 역시 커피를 끓여주시던 일이 퍽이나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남규를 다시 만난 것이 신기하게도 그 무렵이었다. 역시 길거리에서였는데 이번에는 우리집 근처였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우리집으로 와서 오랫동안 지난 일들을 얘기했고 그가 지금 연세대 건축과에 다닌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 당시 나는 남규와 실질적인 대화를 해야 할 건수가 하나 있었다. 음악 듣는 취미는 여전했지만 재래식 전축에 팝송 클래식을 가리지 않고 해적판을 듣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지인의 집에서 오디오 기기를 보고 오신 후 우리도 그걸 장만해야겠다고 하시며 내게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라고 하신 것이다. 그 임무를 맡고는 암담하던 차에 며칠 되지 않아 남규를 길에서 만났으니 신의 섭리라고 해야 하겠지. 

    나는 이 방면에 남규가 웬만한 지식을 갖고 있으려니 생각하고 남규에게 몇가지를 물어보았는데 뜻밖에도, 아니 당연히 남규는 오디오 기기에 관해서 도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중학교 때와는 다른 차원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즉시 남규와 나는 세운상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당시 세운상가 골목을 어떻게 찾아들어가는지, 밀수입된 고급 일본 기기들에 무엇무엇이 있는지, 가격 흥정을 어떻게 하는지 내가 알턱이 있었겠는가? 그저 남규가 가는대로 따라 다니고 남규가 사라는 것을 사는 것이었으니 그러니까 사실 나는 아주 편할 수 밖에 없었다. 갖출 것을 다 갖추어놓고 바라보며 특유의 흐뭇한 웃음을 웃던 남규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 때 남규가 내게 말했다. 이제 귀의 혁명이 일어날텐데 그동안 내가 모았던 해적판들을 자기에게 양도할 수 없느냐는 것이다.나는 친구에게 사례할 방법을 모르던 차에 그 청이 반갑기는 했으나 벌써 한 계급 상승한 기분을 갖던 나로서는 해적판을 물려주는 것이 좀 미안한 감이 들었다. 잡음이 많을텐데 라고 내가 말했더니 잡음도 음악이야 라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20세기 초 전위예술가 일부가 소음을 음악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했던 것을 그 후 알게 되었을 때 잡음도 음악이라던 남규의 말이 생각났었다. 

    과연 남규 말 대로 내겐 귀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동안 즐기던 팝송을 당분간 뒤로 미루고 전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결국 공연이 내 천직이 되고 말았다. 남규를 후에 만났을 때 대학시절 길에서 너를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공연장에 주저앉을 팔자가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말하며 둘이서 같이 웃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내가 하는 말일 뿐이고 팔자는 내 의지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 

    그 후 남규를 한 번 더 만났다. 졸업작품을 만들던 중 어떤 재료가 꼭 필요한데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이것을 구하지 못하다가 내게 전화한 것이다. 혹시 신문사에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해서 나는 부친을 통해 알아보아 금방 그것을 구할 수 있었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것이려니 하고 부랴부랴 연세대 건축과로 달려갔더니 후배들과 함께 졸업작품을 만들던 남규가 "바로 이거 맞아!" 하며 뛸 듯이 기뻐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후 또다시 남규와 멀어졌다. 나의 이 한심한 게으름이여! 2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의 부친이 돌아가신 직후니까 29년 전으 일이다. 갑자기 남규가 몹시 생각나 궁리 끝에 연세대 동창회에 전화해 보기로 했다. 건축과 몇년도 졸업생 누구누구라고 했더니 즉각 연락처를 주었다. 전화가 통했을 때 그나 나나 반가웠던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만나기 전 몇마디 나눈 말로는 지금 그는 조그만 인테리어 회사를 하고 있다는 것, 결혼하고 얻은 첫 아이를 갖난아기 때 잃었다는 것을 얘기했다. 내가 언짢아 하자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지 뭐"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전화 통화한 후 바로 만났는데 그 때 그는 인테리어 회사 운영의 애로점을 털어놓았다. 거의 30년 전이니 지금처럼 한국이 세련된 사회가 아니었던 시절이다. 아파트가 새로 지어지면 건설업자와 동사무소 직원들과 친하게 지내는 무자격자들에게 밀린다는 것이다. 

    

남규와 다시 만난 후 나는 그래도 이전 보다는 자주 남규의 얼굴도 보고 부인도 인사할 수 있었다. 또 남규가 살던 목동 집에 가서 조용하고 곱던 양반 후예 어머니를 수십년 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남규의 집에는 역시 그의 취향대로 이전보다 더욱 업그레이드 된 고급 오디오 기기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무렵 나는 오디오 기기에는 이미 관심이 멀어졌을 때였지만 그의 고급 기기들을 보며 그보다 20여년 전 그와 함께 세운상가 뒤지던 추억이 되살아났었다. 

    나는 남규와 다시 만나고 나니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 오세룡을 만나고 싶었고 즉시 우리는 남규를 찾았을 때처럼 고대 동창회에 전화를 걸어 역시 금방 그를 찾을 수 있었고 우리는 다시 셋이서 만났다. 세룡은 역시 어려서의 공돌이 답게 컴퓨터 관계 일을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나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하는 그는 남규의 모습과는 달리 늙어보였다. 그후 몇 번 그를 만났었고 남규가 병을 얻은 후 내 마음이 스산하기에 그에게 연락해 보았더니 전화가 끊겨 있었다. 동창회 같은데 다시 알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전화도 끊긴 친구를 굳이 만나 무엇하겠는가? 세룡의 소식은 그리하여 더 이상 모른다. 

    인테리어 회사를 한동안 운영하던 남규는 얼마 후 그 일을 접고 큰 건설회사의 전무로 들어갔다. 나는 그가 안정된 생활을 하겠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주의 경영 미스로 회사는 무너졌고 남규의 재산도 그 와중에 날아가고 말았다. 그게 꼭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회사 재정의 책임을 중역이 공동으로 지는 관행이 야비하다는 생각이 들고 회사 중역이란 참 위험한 직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그 내막을 대강이나마 한참 후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표현도 잘 하지 않는 성격인데다 말 해보았자 알아듣지도 못할 나인지라 그랬으려니 한다. 

    

아무튼 그 때부터 남규의 삶은 불행으로 점점 미끌어져 내려갔던 것 같다. 남규가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내가 그를 내 직장으로 불러 점심을 같이 한 적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는데 앉아 있던 여직원 몇이 팝스타 같이 생긴 남규의 용모와 체구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머어머, 친구분이세요?" 하고 외치던 일이 생각난다. 커피숍을 나와 얼마 걸어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여직원들이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최근 몇년 동안에 남규 꿈을 종종 꾸곤 했는데 꿈에 나타나는 남규의 모습은 항상 그 때 여직원들이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날씬한 모습 그대로였다. "어, 이제 다 나았구나!"하고 내가 꿈 속에서 반가워 외치면 깔끔한 양복을 입은 그는 평소대로 말없이 흐뭇한 웃음을 웃곤 했다. 

    그를 내가 다니던 직장에 부른 것은 혹시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 묻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와 동급의 경영 책임자 자리가 공석이었고 빨리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라는 하명이 있어 몇 간부들이 각기 적당한 사람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내게 생각나는 사람이 남규였을 뿐 그가 그 직장에 오는 것은별로 내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곳도 조직이었던 만큼 다른 데처럼 야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 공연장의 운영체계는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서양에 비하면 지금도 미개한 수준이거니와 20녀년 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하고한날 민노총과 비상식적 싸움을 해야하던 나날이다. 그 와중에서도 나 자신은 공연장이라는 이름에 값하지 못하는 그러한 조직에 그나마 익숙해 있었고 내가 책임을 맡은 부서는 그래도 내 적성에 맞는 실무가 있었다. 사실 그곳은 세금을 쓰는 곳이라 공무원들과 친하고 얼렁뚱땅하면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는 곳이니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역설적으로 편한 직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우가 밝고 꼼꼼한 성격의 남규가 그곳을 견디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마침 그런 조직에 잘 맞는 사람이 오게되어 친구의 제안에 대답을 주기 어려워하던 남규는 다행히 그곳으로 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가 강남역 근처에 레스토랑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급히 달려가보니 역시 남규 취향이고 내게도 무척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세련된 인테리어는 남규와 부인의 공동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몇번 찾아가는 동안에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식사하면서 와인 등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는데 문제는 당시 20여년 전 상황으로는 너무 세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부담없이 들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주 젊은 층들이 오기에는 음악이 주는 분위기가 조금 윗세대 겨냥이고 너무 점잖다. 주로 비즈니스 하는 고객들이 선호하는 여자들이 서브하는 곳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곳은 40대 불륜커플이 오기에 알맞다고 농담했는데 대상 고객이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문제점은 장소에 비해 먹고 마시는 값이 너무 싸다는 것이었다. 삼겹살 구워먹으며 소주 마시는 곳도 아니고 여자가 서브하며 비싸게 때리는 곳도 아닌 이곳이 재정적으로 힘들 것이라는 점이 눈에 보였다. 

    그 무렵 남규네는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데로 이사하여 우리는 부부끼리 몇번 만나곤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또 불행한 소식이 들려왔다. 남규의 배우자답게 조용한 성격의 부인이 암에 걸렸다는 것이다. 원래 회화를 전공했던 미세스 최는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남규 말로는 금속을 녹이는 화학 약품들에서 나오는 독기가 암의 원인일 거라고 했지만 그것은 결과가 나온 후의 설명일 뿐이고 확실히 그게 원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루에 세갑 씩 담배를 피웠던 나의 선친은 80이 되기 전에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폐암이 원인은 아니었다. 어느 중병이든 가장 보편적이고 신빙성 있는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생각한다. 남규의 경우는 객관적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만 하지 않은가?

   

 2004년인지 혹은 그 전이었는지 하여튼 그 무렵 어머니부터 가시고 2005년에 마침내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무슨 종류의 암이었는지 나는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수술하면 별 문제 없고 완치되기까지 하는 암들이 많다는데 남규의 부인이 지녔던 암은 그런 종류가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치료되지 않을 병, 괴로운 삶을 연장하면 뭐하겠느냐고 하면서 부부는 암치료를 중단했고 부인은 의사가 예상한 시한에 거의 맞춰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상처한 직후 내가 남규와 아들을 우리집에 한번 불렀다. 집밥을 못 먹어본지 몇년인지 모른다고 하며 허겁지겁 밥을 먹던 그의 모습이 그후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그의 사업은 분명 내리막 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마지막 선고를 받았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당구학원에 다닌다고도 하고 등산하기도 한다던 그가 어느날 발을 자꾸 헛디딘다고 하기에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했는데 그러나 병원에 빨리 가면 예방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그는 이미 헤어나오지 못하는 덫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그가 최종진단을 받기 조금 전 나는 병원 측으로부터 루게릭 병이라는 말을 들었고 쇳덩어리로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그런 선고를 받으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확실한 최종 진단을 아직 못들었지만 무슨 나쁜 예감이 왔는지 남규가 전화를 하고 "근무력증인 것 같은데 근무력증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근무력증이 어찌 아무것도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거라고 판결을 받는다면 너무 반갑고 기쁠 것 같다는 식의 말에 내 가슴은 몹시 아팠다. 

    지팡이를 짚다가 휠체어를 타다가 마침내 침대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성대 근육이 움직이지 않아 어눌하던 말이 웅얼거림이 되었다가 그나마도 못하게 되었다. 목구멍 근육과 식도 근육ㅣ 움직이지 않아 가슴을 뚫어 영양제를 넣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대체 이 친구가 60년 가까이 사는 동안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 형벌을 당해야 하는가? 그렇게 선량하던 그의 가족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계속 불행을 만났어야 했나? 만약 삶에서의 잘잘못을 정확히 가려 벌을 내리는 제도가 있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저 끄트머리 순서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다. 

    논리를 따지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이럴 때 하는 설명이 있다. 전생이라는 것이 있고 남규와 그의 가족은 전생에서 남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하여 지금 이 생에서 벌을 받는 것이고 다음 생은 편하리라는 것. 그럴 듯하긴 하지만 그럼 지금 악행을 저지르는 숱한 무리들은 전생에 무엇이었기에 이생에 그런 것들로 태어났다는 말인가? 당장 급살을 맞아 거꾸러진다면 시원할 것들이 피둥피둥 살아있는 세상이 아닌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어도 최고 형벌이 삽시간에 끝나는 사형이요, 그 다음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병나면 치료해 주는 무기징역이다. 15년 동안 남규가 당한 형벌은 상상도 하기 싫다. 

    

나는 2000년에 안과 의사로부터 앞으로 5년 버티면 잘 버티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고도 더 5년을 버티다가 2010년에 사표를 내고 직장과 공연계를 떠났다. 그렇게 더 오래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곳 역시 세금을 쓰는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을 나오면서 동시에 나는 복지카드를 받아 정식으로 장애인이 된 셈 이다. 그 무렵 남규는 낙성대 역 근처의 아파트에서 아들과 위아랫층에 살면서 간병인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당시 나는 정기적으로 낙성대 역 근처에 갈 일이 있었는데도 지하철은 간신히 타고 다닐 수 있었지만 나 혼자서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남규를 방문한 것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보다 10년 쯤 전에 젊은 여성들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던 그의 모습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정식으로 장애인이 되고서도 게으른 나는 음악이나 들으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2년 후에야 비로소 봉천역 앞에 있는 시각장애인복지관에 다니게 되었다. 거기서 배운 것은 마우스 없이 소리를 들어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는데 아주 유용했지만 나의 지적 작업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신의 섭리라고 여겨지지만 나를 도와줄 어떤 분을 만났다. 나보다 10여년 아래인 그는 아무런 댓가도 없이 자진해서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세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를 통하여 나는 컴퓨터에 들어가는 전자책 뿐아니라 내가 소장하고 있는 일반 책을 읽는 법, 외국어를 읽는 법, 음악을 듣고 다운 받는 법 등 여러가지를 골고루 배울 수 잇었고 이메일을 쓰고 보내는 방법도 알게되어 외부와의 소통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하루하루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으니 이는 결국 내 복이랄 밖에 없다. 

    봉천역이 낙성대역에서 두 정거장 밖에 안되는데도 그를 찾아갈 수 없던 나는 남규와 이메일을 주고받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생각 끝에 내 목소리를 보내기로 했다. 내 목소리를 처음 받았을 때 남규가 무척 반가워했다는 말을 아들에게서 들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혼자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얘깃거리가 없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만나 잡담하는 내용은 보통 세상사에 관한 것인데 남규가 세상사에 관심을 가질 리도 없을 것이고 나 역시 점점 은둔자의 삶을 살다보니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노래를 보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때 우리가 열심히 듣던 Top Twenty Show를 본받아 20곡 씩 우리가 즐겨듣던 팝송을 위주로 보냈는데 노래의 갯수나 시간이나 적절했다. 유튜브라는 편리한 도구가 있어 무슨 노래든 찾아보면 대개는 얻을 수 있다. 남규에게 보낸 첫 스무 곡들 중에 Shirelles의 Baby, it's you가 들어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번에도 남규가 무척 즐거워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매주 한번 씩 보내기로 했다. 나로서는 어려서 듣던 노래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얼마 전부터 남규는 요양원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아들이 그를 매주 방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쨌든 정기적으로 노래들을 보냈고 밀린 곡들은 한꺼번에 듣는다고 했다. 

    

그동안 남규는 아들을 결혼 시켰고 곧 손녀도 보았다. 요양원으로 옮겨갈 때 아들의 곁에 살면서 커가는 손녀를 자주 못 보게 된 것이 남규로서는 섭섭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비전문적 간병인 보다 시설 좋은 곳에서 확실한 배려를 받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아들의 결정이었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요양원을 방문해 둘러본 친구들의 의견이다. 

    남규가 요양원에 있게 된 후 나는 요양원을 일부러 방문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함께 가자고 내게 권했지만 나는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장님과 벙어리가 만나면 무엇하겠는가? 내가 어릿어릿하는 모습을 남규가 곁눈으로 본들 그의 마음만 아플 것이고 내가 뼈만 남은 그의 몸을 만져본들 과거 날씬했던 모습을 머릿 속에 계속 간직함만 같지 못하다. 

    

그러다가 이 더러운 2020년이 되었다. 그나마 소통하던 것도 차단되었다. 남규의 마지막 고통은 끔찍한 고독이었을 것이다. 나는 남규가 병석에 누운 후에야 비로소 프랑스 저널리스트였던 장 도미닉 보비가 쓴 <나비와 잠수종>을 읽어보았다. 잘나가는 잡지 편집장이었다가 전신마비를 맞은 그는 한쪽 눈꺼풀만 움직여 이 책을 썼다 한다. 일반인이 글 쓰는 방법으로 쓴 거라면 이 책은 분량이 적은 책이라고 할 수 있으나 눈까풀을 움직여 이만큼 글을 쓰다니! 글쟁이였으니 글로 생각을 남기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겠지만 이 얼마나 대단한 집념인가? 나는 남규의 입장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에게서 일생 동안 한 장의 편지도 받아본 적이 없으니 그의 글솜씨가 어떤지도 모르고 공돌이인 그가 무슨 짧은 글이라도 명문을 썼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병석에 누워 머릿 속으로 생각하였을 오만가지 상념들은 보비의 글을 평가하는 입장에서 보면 잡동사니 뒤죽박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이런 문제는 남규가 병석에 눕기 훨씬 전부터 생각해 오던 테마였다. 음악을 듣는 나로서는 말과 글의 한계를 확신한지 오래다. 말과 글은 과연 인간의 특권이지만 말과 글의 한계를 명백히 시인했을 때 역설적으로 말과 글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인류의 유산이 된 대문호의 작품들이 그렇고 위대한 철인들이 남긴 말들이 그렇고 보비의 감동적인 글이 그렇다. 그런데 말과 글이 주제넘게 한계를 모르고 자만해지면 한없이 천박해진다. 내가 소위 예술평론이라는 글에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다. 깊은 사색이 부족한 사회에서 난무하는 저 지저분한 정치적인 요설들!

    

그 긴 세월동안 남규는 보비의 깔끔한 문장으로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상념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의 마비된 성대 근육으로서가 아니라 다시 말해 생물학적 기관이 아닌 차원 다른 그 어떤 것으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려면 마찬가지로 청각이라는 생물학적 기관이 아닌 다른 차원의 그 무엇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나는 20여년 전 한동안 격무에 시달리던 직장을 나와 1년 여 동안 백수가 된 적이 있었다. 매일 아침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련한 나의 스튜디오에 '출퇴근'하면서 오래간만에 자유를 맛보았었다. 그 때 나로서는 처음 사색같은 것을 해보았다. 내가 주로 생각했던 테마는 행복론이다. 나름의 사색 끝에 적어도 인간의 사는 목적은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는 도달했다. 다음 단계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해 보았다. 무수한 주관적인 정의가 있지만 그 개개의 정의보다 더 보편적인 행복의 조건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다가 행복의 조건보다 불행의 조건을 찾아내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불행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 때 내가 얻어낸 결론은 지금까지 아직 바뀌지 않고 있다. 불행의 조건 중 가장 첫 손에 꼽은 것이 바로 육체적 고통이다. 그렇다면 육체적 고통이 없는 것은 일단 행복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그러니까 나의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남규는 명백히 불행했다. 

이제 그 불행의 조건이 없어졌으니 그가 행복해진 것인가?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행복이란 이 삶에서 통용되는 개념이요 그는 우리 삶과 다른 세계로 떠났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가 있어 그보다 먼저 떠난 그의 가족들을 그곳에서 재회할지 어떨지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긍정할지 부정할지는 내 능력 밖이다. 

문득 돌아보니 어느덧 내 주변 사람들이 이미 많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겠다. 

나는 젊어서 너무 시간을 낭비한 것이 한이 되어 그걸 만회하려면 조금 더 살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내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고 내 뒤에는 점점 앞으로 밀어붙이는 군중들이 있는 듯 여겨진다. 

언젠가 나는 그 벼랑에서 떨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어떻게 살리라는 것은 남규가 가르쳐준대로 할 작정이다. 

생물학적 입으로 그가 말하지 않았고 생물학적 귀로 내가 듣지 않은 무언의 가르침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