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어느 날
작성일 :
홍도천 / 작성일 :
2021-03-03 /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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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4월이 다가온다. 이 날의 날짜를 건이는 기억하겠지만 나에게는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묵직한 책가방 가운데에 넣고 부암동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자하문 고개를 넘어 북악산을 끼고 효자동 옥인동 사이로 지나 삼일당을 거쳐 광화문 앞을 통과 안국동에서 내려 화동으로 걸어 올라가는 평소와 다름없이 시작하는 고3생의 어느 날이었다. 중1 때부터 걸어서 경무대 앞을 지나 삼청동으로 빠져나와 중학교 건물 서쪽문으로 드나들었지만 4.19와 5.16을 거치며 청와대로 이름이 바뀐 그 앞 길이 막혔던 적이 많았고 그 날도 한일협정 반대 시국이라 아마 막혀 있었던 것 같다. 규율반원 복무 장소인 교문을 무심히 통과한 나는 오르막 길 끝에서 마중하는 거울 속 나를 흘낏 보고 교실로 향했다.
그 한참 후 나는 닫힌 철제 교문을 바라보는 내리막 길 중간에서 학우들 틈에 끼여 있게 된다. 작년에 고3 선배들이 주도한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고교생 모두 덕성과 풍문 여학생들의 열렬한 격려를 받으며 나선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다가오는 “한일협정 조인 비준”에 반대하는 시위에 다시 나서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 비탈 길 위쪽에 있는 학우들이 아래로 밀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잠겨진 철제 교문이 열릴 리 없고 “밀지마 다친다”는 고함 소리만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미스터 경기 나와라”는 소리가 나의 귀를 때린다. 고1부터 역도반에서 몸 만들기 운동을 나름 열심히 하여 요새 몸짱이라 불리는 미스터 경기로 뽑힌 것인데 이 날 갑작스레 부름받은 몸이 된 것이다.
학우들 틈 사이로 보니 닫힌 교문을 막아 선 국사 선생님이 유도 메치기 기술로 나가려는 학생들을 잡아 돌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날렵한 창진이 교문을 타고 넘어갔다. 그런데 아직 계급장을 달기 전이라 따르는 학도병이 전혀 안 보인다. 혈혈단신의 창진이 진압 경찰의 엄포에 도로 넘어 들어왔다. 이를 본 나는 옆에 있던 성국에게 본관 쪽으로 가 보자고 했다. 건물 뒤쪽 공작실로 들어가 보니 마침 곡괭이가 보였다. 성국의 염려스런 눈길을 모른 체 하고 나는 곡괭이 대가리를 분리하여 허리에 찼다. 교복 상의를 단정히 내리고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운동장을 가로 질러 교문으로 향했다. 내리막 길 옆 화단을 타고 교문에 도착하여 허리춤에 찬 곡괭이 대가리를 뽑아 내어 뾰족한 쪽을 교문 빗장걸이 자물쇠 고리에 걸었다. 그리고 반대쪽 곡괭이 날을 “탁” 치니 “툭” 하고 자물쇠가 열린다. 위험한 흉기가 될 수도 있는 곡괭이 대가리를 얼른 바닥에 내려 놓고 학우들이 열어 제낀 교문 사이로 나와 시위대에 섞여 나아갔다.
평소 다니지 않던 길로 와서 지금 내 기억에 없는 것 같은데 어떻든 우리는 낙원동에서 종로 진출을 앞두고 연좌시위를 하며 진압 경찰과 대치 국면에 처하게 된다. 어느 순간 시위대 앞쪽이 소란스럽더니 경찰의 방망이를 피해 학우들 모두 후퇴하는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나도 급히 일어나다가 경찰에 밀렸는지 운동화 한쪽이 벗겨지고 안경도 땅에 떨어져 버렸다. 일단 아무거나 집어 벗겨진 발에 끼고 보니 경찰이 내 안경을 주워 한 손으로 건네는데 다른 손에 있는 방망이가 나를 노려 본다. 겁이 난 나는 그냥 뒤로 돌아 달리다가 골목길 입구에 있는 지하 출입구로 내려가 버렸다. 갑자기 어두워지자 안경이 벗겨진 고도 근시인 내 눈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것은 낮은 테이블과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다방 종업원이었다. 내 기억에 1시간 정도 거기 머무른 것 같았다. 다시 올라와 밝은 햇빛 아래 보니 내 눈에도 진압 경찰같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터덜터덜 걸어서 학교로 가다 보니 한쪽 발이 불편하다. 엉겁결에 꿰어 신은 것이 다른 쪽 운동화였던 것이다. 대부분 운동장에 모여 서성이는데 누가 와서 내 안경을 건네준다. 진압 경찰에게서 받았다는 것이다. 그 경찰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소심한 내가 아까 무슨 바람에 교문 자물쇠를 부숴버렸는지 의아해 하는데 나를 발견한 창진이 다가 온다. “교문 자물쇠 내가 열어 제낀 것으로 하자”는 그의 요구에 “그래” 하고 대답하는 나는 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정신분석을 요하는 일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니까. 그리고 교실로 들어간 것 같다. 그러다 3층 복도에서 교감선생님과 마주치게 된다. “잘 했어” 스쳐 가시던 선생님이 내 등을 넓적한 손으로 치며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교내 시위 현장조사 결과 내가 기물 파괴 단독범으로 밝혀져서 교무실로부터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통지를 받게 된다. 어머님과 같이 교문을 지나 오르막 길을 걸어 올라 그날도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운동장을 가로 질러 본관 2층 교무실로 들어갔다. 몇 명이 불려 왔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모두 목을 빳빳하게 들고 앉아 있었다. 내 생각에 건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고 다른 얼굴은 기억에 없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너는 왜 거기서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느냐는 꾸중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씀을 하셨다. 나는 1주일 무기정학이라는 선고를 받았고 건이도 같이 1주일 무기정학을 받은 걸로 알고 지냈다. 그리고 학교는 1주일간 휴교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무기정학 받은 일을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다.
나는 이과반, 건이는 문과반이고 평소 친하지는 않았지만 무기정학 이후 건이에게 막연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말을 나눈 적이 없이 졸업하고 각자 가는 길을 따라 살다가 1990년 경에 서울대에서 열린 학회 참석시 교수회관에서 점심을 먹다가 건이를 마주치게 된다. 내가 공학박사, 대덕연구단지 무슨 연구부장을 자랑스레 새겨 넣은 명함을 건냈지만 그는 자기 명함을 내게 주지 않은 것 같다. 별 이야기 없이 헤어지고 금년 1월 20일 (스마트 폰 기록) 생후 처음으로 건이에게 전화를 하여 무기정학에 관한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법학도인 그는 시위의 의의와 전말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놀랍게도 그는 내가 그 날 교문 자물쇠를 파손하여 1주일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건이는 웅변반이었던 열정적인 준호에게 시위 참여를 선동하도록 부탁하여 무기정학 10일 처분을 받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시위 계획범으로 2주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이건 또 금시 초문이다. 내 기억에 어찌하여 준호는 없고 고2생 2명이 함께 무기정학 처분 받은 것으로 새겨져 있는지 정말 나도 모를 일이다. 건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무기정학의 기간을 왜 3인 모두 다르게 미리 정하여 선고했는지 수상하다. 기간이 다른 것은 사범의 경중에 따른 것이라 하겠지만 2주 정학, 10일 정학 그리고 1주 정학인 것을 모두 무기정학이라 하다니....그런데 건이가 졸업 40여년이 지난 후 고교 학적부를 열람했더니 자기가 무기정학이 아니라 사고로 2주 결석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도 이제 와서 학적부를 열람할 생각은 없고 건이의 추측과 교감 선생님의 칭찬을 종합하여 보면 학교에서 시위 사범 3인에게 단순히 겁을 주어 고3 본연의 임무인 대학입시 공부에 열중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중1때 겪은 4월의 19일, 일찍 하교하던 나는 당시 중앙청 앞에서 검은 연기를 날리며 불타는 짚차를 보았고 옥인동 우리 집앞 신작로에서는 무장 경찰들이 시위하다 쫒겨 도망가는 학생들에게 총을 쏘았다. 4살 위 보성고 다니던 형은 그날 밤 귀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밤새 병원을 전전하며 시신들을 확인하고 다니셨다. 다음 날 멀쩡히 귀가한 형에게 우리 식구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참견연대(59.10.70.77)
2021-03-04 09:47:33 
나도 고2 땐가(기억이 아삼삼하네) 교문을 나서 시청앞 광장에서 모여 반도호텔(5층)보다 어마어마하게 더 높은 뉴코리아호텔(11층?) 앞에서 '한일회담 반대' '매판자본 물러가라' 등 구호를 외친 기억이 있는데 아직도 내가 한 행동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매판자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홍도천(49.174.230.7)
2021-03-04 10: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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