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반세기 사느라고 허덕거리던 나에게는 그 당시의 기억은 완전 망각의 경지에 묻혀 있었는데, 다 늙어서 영문학과를 다니며 창작을 한답시고 십수년을 지내다 보니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4월의 어느 날”과 답글들을 보고는 처음에는 입 꽉 다물고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도 답을 해야겠다.

우리가 처음 길에 나갔을 때는 정부가 일본과 협상을 하는 도중이라서 우리 국민들의 감정이 어떤가 일본에게 보여 준다는 면에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했다. 그러나 두번 째, 우리 3학년 때에는 협상이 끝난 사정이어서 우리의 데모는 반정부 행위로 간주가 되었다. 그래서 얻어 맏고 징계를 받은 것이었다. 그 일의 바로 전날 나도 저녁 늦게 어디로 모이라는 말을 듣고 갔더니 열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회의의 의장은 학생회장 박상근이었다. 이 모임이었는지, 아니면 그 일년 전이었는지, 아니면 더 옛날이었는지, 선배가 참석했었었다. 붉어진 얼굴로 성토를 하는데, 지금이나 그 때나 열내어 얘기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던 나는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예정된 이른 시각에 학교를 가 보니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전 날 모임에 온 사람들 중에 스파이가 있었나, 누굴까 생각도 했었다. 교문을 열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때 무슨 이유였는지 교무실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마침 온 전화를 받은 김영기 교장 선생님이 “애들이 거리로 나갔읍니다. 막을 수가 없었읍니다.” 하시는 것을 들었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던 김영기 교장은 변두리 여자 중고학교로 좌천이 되었다. 박상근을 따라서 나는 그 때 문교부에서 고위(장학관?)에 있던 김원규씨를 찾아 갔다. 그러나 대문 밖에서 부인께서 선생님을 만날 수 없다고 부드러우면서도 엄한 메시지를 받고는 뒤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상근과 김영기 선생님의 학교에도 찾아 갔다. 무슨 말을 했었는지 인사만 꾸뻑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상근이는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에 남보다 제일 긴 ‘무기’정학을 받았는데 한달이었었나. 학생회 총무였던 나에게는 아무도 묻거나 질책하는 선생님이 없었다. 정학 받은 친구들 생각하면 미안하고 비겁하다고도 느꼈었다. 우리는 우리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선새님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회장이 그렇게 되자 학생회 일, 별로 할 것들은 없었지만, 그 것이 나에게 왔고, 조회 때 구령하는 것이 전부였던 연대장도 내게로 떠밀려 왔었다. 무조건 어서 졸업하고 떠나자는 도망자의 심리로 견뎌냈었다.

참으로 희한한 시절이었다. 졸업 앨범을 보니 끝에 편집후기가 있는데, 글씨가 개망난이던 내가 쓴 것을 사진사의 직원이 다시 쓴 것이겠다. 그 때 내 머리 속은 주로 어둠 속에서 휘려치는 폭풍의 상태였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편집후기는 잘 쓴 것도 아니고 지금 보면 웃기는 부분도 많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한것이 신기하다. “순식간에 지나간 고등하교 시절이었다. 짧은 동안이었지만 일생을 통해 가장 많이 번민하고 즐거워했으며 또 가장 급속했던 발전의 3년이었을 것이다. 과연 이 3년간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까 하고 되돌아 보게 된다.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뀔 때마다 지난 날을 돌아 보며 더 좋은 내일을 꿈꾸었던 우리였다. 이제 그동안의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한 책 안에서 보니, 그 얼굴 얼굴에 서린 이야기와 사건들, 지나간 3년간이 후회와 그리움과 함께 우리를 엄습한다. 친구들의 얼굴은 변하여 중학교 때의 어리고 천진했던 얼굴에 어떠한 생존의 격전장 속에서도 살아 남을 만한 투지와 힘이 긷든 듯 하다. 어제의 선배가 그랬고 내일의 후배가 또한 그리 할 것이지만 이제 우리도 학교를 떠나서 좀더 훌륭한 열매를 따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그리고 몇줄 더 인사을 말이 있는데, 지도를 해 주신 문성용 선생님에게 감사의 말이 써 있다. 그 문성용 선생님이 그 후 20년이 지나서 내가 사는 미시간주에 이주하신 것도 정말 희한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