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바꿔쓰기가 안된다는 지적에 확인차 올리는 글입니다.

시험 후에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

마흔 중반의 딸아이가 자기 세상에 갇혀 바쁘게 살다가 그만 전세 놓고 있던 아파트의 계약 만기일을 놓치고 소위 묵시적 연장에 들어가고 보니 이제껏 세 살던 아파트에선 대책 없이 먼저 나가야 하는 경우가 됐다. 정부의 부동산정책을 탓해야 하나?... 예전이라면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이사 날짜를 조율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러다가 우리 부부 둘이 사는 제법 넓은 아파트로 대책이랍시고 임시 기댈 곳을 찾아 들어왔다. 짐 대부분은 어디 창고에 맡겨두고 단촐하게 딸과 딸의 딸 둘이서만 들어왔을 뿐인데 집이 갑자기 번잡해졌다. 책이랑 옷이랑 신발이랑 몸 따라 와야 하는 짐도 많고 한참 성장기인 소녀아이의 정서적 소란과 입담도 만만한 게 아니다. 그러다 보니 모녀삼대가 사는 곳에 내가 끼어 사는 모양새가 됐다.

몇 달이 지났을까? 점잖은 분들이 이 쪽 사정을 알았던지 그 쪽 사정이 있었던지 그만 이사 나가겠다 하면서 우리 집에 때아닌 2차 소동이 일어났다. 아이들 짐 나가는 김에 우리 집 짐정리도 하자는 마나님의 돌출 의견, 거의 명령 수준이지만... 옷도 정리하고 웬만한 책들도 버리고 그릇들, 낡은 가구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자면서 벌써 현관 앞에 내놓고 있다. 옷이나 가구야 내 관심사가 아닌데 서가에 40년 넘게 꽂혀있던 그동안 한번도 읽어볼 일 없었던 옛날 책들도 방바닥에 내려와 무서운 처형을 기다리고 있네?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책들... 古文眞寶, 청계천 헌책방에서 전집류 중에 낱권으로 뽑아 샀던 시집 한 권, 그리고 또다른 한국문학전집 36권 한 질, 그리고는 창간호부터 모아두었던 문학과 지성... 또 1994년부터 큰 맘 먹고 10년이나 구독했던 National Geographic 100여권... 이 섞여 널부러져 있다. 아내는 과감했다. ‘지나치게 용감하다’의 준말이지만 오랫동안 짐스러운 책들을 많이도 참아왔던 모양이다. 나는 발언권을 자제하면서 한편 부탁하면서 몇 권을 골라냈다. 사형장에서 마지막 사면을 청했던 책은 고문진보와 시집 한 권, 그리고 한국문학전집 36권 가운데 3권 현진건, 30권 정을병, 36권 김승옥 세 권이었다.

딸 가족이 이사 나간 뒤, 반쯤 비어있는 서가를 뒤로 하고 등받이 의자에 깊게 앉아 책상 위로 다리를 올려놓은 채 사면받은 책을 읽는다. 古文眞寶... 참 글짜도 작고 한자 투성이에 누렇게 변한 갈피들마다 종이 냄새가 퀴퀴하다. 60년 전, 아니 초판이 1964년이니 57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이리라. 그 때 책은 대부분 세로읽기였으니 한문 싯귀 옆에 그어놓았던 세로 옆줄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笑而不答心自閑... 뜻이 좋아 펜으로 옆줄까지 쳐가며 마음에 담아둔 글귀일까 아니면 국어책에 있던 어느 시인의 詩句와 닮았기 때문일까? 그러다가 이태백의 月下獨酌에 눈길이 끌렸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盃邀明月 對影成三人...

“꽃 사이 놓인 한 단지 술을 친한 이도 없이 혼자서 마신다. 잔을 들어 명월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대하니 세 사람이 되었네.”

그나저나 모녀삼대 집안의 가장 격인 내 마누라, 내 이리 좋아하는 줄 모르고 眞寶를 버리려 하다니...? 내 서가에는 고문진보와 시집 외에 통채로 사면받은 한국문학전집 36권 한 질 전체가 그대로 꽂혀있다.

현진건과 정을병 그리고 김승옥 세 사람이 우리 집에서 한국문학을 살린 셈이다.

註 :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마지막 구절, '왜 사냐건 웃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