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Back

자유게시판

상세보기
늑대에 물려 죽다
작성일 : 박노문 / 작성일 : 2021-09-08 / 조회수 : 329
늑대가 우리나라에서 언제 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짐승은 이솝우화와 그림동화를 통해 어린이들의 심상에 여전히 뚜렷하게 살아있다. 폭력과 악의 상징으로서 이야기 속의 어린 주인공들을 위협하고 공포에 빠뜨리지만 끝에 가서는 패배하여 꼬리를 샅에 말아 넣고 도망치는 야수, 그런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결과를 보면서 박수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그래서 그런지 내 손녀들도 늑대놀이를 매우 좋아해 몇 달 전부터는 놀러올 때마다 거르지 않는다. 어제도 놀러온 둘째의 두 딸, 효진(여섯 살)과 예진(네 살)이 늑대놀이를 하자고 나를 졸랐다.
놀이의 개요는 거실 한 편에 세워져 있는 직경 1미터의 장난감 파오 안에 손녀들이 문을 닫고 들어가 있고, 늑대로 분한 내가 애들을 잡아 먹으려고 하나 실패한다는 내용인데, 동화 "늑대와 일곱 새끼 염소"와 "세 마리 새끼 돼지"에서 줄거리를 따온 것이다.
늑대가 된 나는 파오 앞에서 큰 소리로 독백을 한다.
"아이고! 배가 고파 죽겠네. 어! 좋은 냄새가 이 집에서 나오는데 엄마는 없이 애들만 있는 게 틀림없어. 앗! 문이 잠겨 있군. 좋아! 애들을 속여서 문을 열게 해야지."
나는 여자 음성을 흉내내어 말했다.
"애들아, 문 열어라! 엄마가 왔다."
손녀들은 이중창으로 "아냐! 우리 엄마가 아냐!"라고 소리친다. 어니 효진은 한 술 더 떠서 "우리 엄마 목소리는 이래."라고 하더니 어른 목소리를 낸다고 가성을 써서 "애들아, 문 열어라! 엄마가 왔다."를 재연했다.
나는 회사에서 돌아온 아빠라고 속이려고 했지만 그 또한 실패.
다음에는 청년 음성과 말투로 "택배요! 택배 왔습니다."라고 외쳤지만 실패했다. 효진이 내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더니 시커먼 털이 난 늑대 앞발이란다. "넌 나쁜 늑대구나!"
마지막으로 난 과일을 파는 노파로 변장하고 맛있는 빨간 사과를 공짜로 주겠다고 유혹했지만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들어 아는 효진은 "그건 독사과야! 안 돼!"하고 요지부동이다.
드디어 화가 난 나는 으르렁거렸다.
"그렇다! 난 배고픈 나쁜 늑대다. 문을 열어라! 순순히 문을 열면 너희를 잡아 먹을 때 깨물지 않고 한 입에 꿀꺽 삼켜 아프지 않게 해주마. 문 열어!"
"싫다! 못 연다."
"그럼 난 바람을 불어서 이 집을 부숴버리겠다."
나는 푸우푸우 숨을 내쉰다. 그러나 늙은이가 숨을 내쉬어봐야 히만 들뿐 파오는 흔들리지 않으니까 바람과 함께손으로 잡아 조금씩 흔들어댄다.
보름 전에 첫째의 외동딸 보나(네 살)와 늑대놀이를 했는데 이쯤 되면 보나는 겁이 나서, "할머니, 도와주세요!"라고 구조를 요청했다. 그러면 아내가 나타나 "나쁜 늑대는 저리 가라!"라고 소리치고 나는 "아이고, 무서운 할머니다!"라고 하며 도망치면서 놀이는 끝났다.
그런데 어제는 요 자매가 서로 의지가 되는지 겁을 내지 않고 도리어 "못 들어오지. 메롱! 약 오르지?"라고 나를 놀리며 굳세게 버텼다.
결국 늙은 늑대는 기진하여 "왜 애들이 그렇게 똑똑하고 용감하지? 아이고, 그만 집으로 돌아 가야겠다."라고 하며 일어섰고, 지네들이 이겼다는 애들의 환호 속에 놀이는 끝났다.
그런데 어디서 착상을 얻었는지 요놈들이 역할을 바꾸어서 다시 한번 늑대놀이를 하자고 나에게 강요했다.
결국 나는 좁은 문을 통해 기어 들어가 파오 속에 들어앉았고, 애들은 두 마리 늑대가 되어 나를 속여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엄마로 실패했고 아빠로도 실패했는데, 지혜롭고 경험이 풍부한 늙은 염소가 그런 얄팍한 수법에 넘어 가겠는가?
그런데 아무 말도 없이 예진이 문 옆의 틈으로 장난감 주스 병, 토마토, 그리고 자동차를 밀어 넣어준다. 그러더니 언니 효진이 "문 열어라! 할머니가 왔다. 선물로 오렌지 주스, 토마토, 자동차도 가져 왔다. 문 열어!"라고 말하니, 요놈들의 꾀와 협동작전이 기특헤서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벨 크로를 뜯고 문을 열었다.
"앗! 늑대다. 난 죽었다."
손녀들은 승리감에 눈을 반짝이면서 난지 염소인지를 잡아먹는 시늉을 했다.
"아! 맛있다!"
(끝) (2021년) 박노문 씀. 

깍두기(220.71.19.31) 2021-09-09 07:56:22


노무니, 참 오래 간만이네. 반갑다.

어린 손주들과 놀아 주려고 연극배우가 되고,
늙은 친구들 재밌게 하려고 동화 작가가 되어 "짠" 하고 등장한 노무니의 마음이 고맙다.

손주들 재롱을 보고 또 손주들 앞에서 재롱을 떨면서 보내는 이 시간이 인생애서 제일 향복한 시간이지.

건강하시게!

홍도천(49.174.230.7) 2021-09-09 09:30:58

아 재밌다.
미안하지만 앨범을 뒤져보니 3-2반 박노문. 한 반 한적이 있었다면 더욱 미안!
요새 우리 늙은이들은 이제 수준이 맞아떨어지는 손주들하고 이렇게 놀았다는 것이 자랑이지. ㅎㅎ
요새 게시판에서 문과반 출신 글 보기가 무척 힘든데 반갑네.
역쉬 문과반 답게 각본, 각색, 연출, 연기 1할아버지 4역...우리 동기들의 귀감이 되는 할아버지일세.

이필한(59.10.70.77) 2021-09-09 09:33:43

드디어 등장하셨군. 반가워요! 책 아직도 읽고 있는 중인데 다 읽으면 소개하려네. 홈페이지를 풍족하게 해 주실 소설가 납시었습니다~
  1 /  
이름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