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고등학교62회동기회

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바닥글 바로가기

자유게시판

상세보기
비련의 공주 작성일 : 깍두기 / 작성일 : 2021-12-28 / 조회수 : 208 ♥ 좋아요 : 20
또 한 해가 갑니다. 송구영신 선물로 공상 소설 하나 보냅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허구임을 금방 알아 차리겠지만 그냥 재미로 보시기 바랍니다. *************************************** 비련의 공주 나도 꼰대들의 연인인 그 녀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비 오는 날, 학교 강당에서 열린 남북 공동선언 설명회가 끝난 후 주최측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게 나오다 보니 청중들이 이미 흩어져 썰렁한 로비에는 나를 기다리던 후배 하나와 여학생들 몇 명 뿐이다. 여학생들에게는 신경을 안 쓰고 후배와 함께 한적한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조금 전에 주최측인 중정요원들과 했던 입씨름에 대하여 수다를 떨면서 가는데.... 내 목소리가 커서 다 들렸는지 어느 새 몇 발짝 앞서 가던 여학생 둘이 돌아 서더니 내가 그들을 지나쳐 갈 때까지 쳐다 보고 서 있다. 말꼬랑지 머리를 길게 따서 늘어 뜨리고 서 있는 그 녀는 나뭇꾼을 떠나 날아 간 선녀 만큼은 아니라도 품위와 미모를 잘 갖춘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런데 .... 뜻 밖에도 그 녀는 그 녀였다. 우리 뒤에 오는 누굴 기다리나 뒤를 돌아 봐도 아무도 안 보인다. 옆에서 작달막한 언니가 받쳐 주는 우산 속에 서 그 녀가 쏘아 보낸 강렬한 레이저 눈빛이 나를 설레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못 할 말은 아니더라도 달콤하기 보다는 쓴소리를 많이 했으니 혹시라도, 그 녀의 머리가 단단했으면 "저런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사고방식을 가진 녀석을 중정 애들은 왜 안 잡아다 족치지? 쌍판이나 보자." 라는 생각이었겠고, 반대로 유연한 머리의 소유자 였으면 "저런 시각으로 보는 백성도 있네. 호기심이 나니 이야기나 나눠 보면 좋겠네." 라는 생각이었을 지도 모르고, 그것도 아니면 "저 시끄러운 녀석들 먼저 보내고 조용하게 걷고 싶어." 라고 생각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경우였거나 간에, 평소 같았으면 "안녕하세요?" 하며 작업을 걸었어야 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녀의 신분 때문에 였을까? 내가 워나기 숫기가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내가 일편단심 민들레였기 때문이었을까? 짧은 순간 놀랍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었지만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 가다가 그만...... 꿈이 깨었다. 아무리 꿈이라도 매우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어찌 보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지만 옷깃도 스치지 않게 되었으니 인연도 아니게 되었다. 늘 추종자들에 둘러 싸여 높은 성에 갇혀 버린 공주, 그 녀를 구출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보내 버렸는 지도 모른다. 수 많은 벌들에게 에워 싸인 여왕벌도 어쩌다 한 번 쯤은 신혼 비행을 하는데, 격동의 세월에 공주의 신분 때문에 나라와 결혼을 하도록, 아무도 강요 하지 않은 강요에 못 이겨 성녀가 된 그녀. 나는 그러한 위치에 있어 보지도, 관심도 없지만 그 외로움만은 충분히 같이 느낄 수 있다. 권력이든 돈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욕망의 대상을 가진 사람의 주변에는 늘 파리들이 꼬이게 마련이다. 모두들 그 녀를 위하고 충성을 한다고 맹세를 한다. 겹겹이 인의 장막을 치고 단물을 빨다가도 그 녀가 조금만 방심하거나 틈을 보이면 배신을 할 무리들 뿐이다. 거기서 살아 남으려면 성녀가 석녀로 변해서 강해 져야 하고 항상 긴장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배신을 당하고 견디기 어려운 세월을 보내 보지 않고는 절대로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그 업보를 평생 홀로 짊어지고 온 그 녀가 며칠 후 석방 된다. 5년 동안의 참선을 마치고 나오는 그 녀의 이름을 외치며 왕년에 중독 되었던 군중의 환호로 요란을 떠는 것이 그 녀를 향한 진한 사랑의 표현일까? 자기들의 흔들리는 정체성에 버팀목이 되어 달라는 피맺힌 절규일까? 나는 그 녀가 말년에나마 조용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槿惠新年 ! HAPPY NEW YEA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