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 희준이는 가끔 정릉동의 우리 집에 왔다. 특이한 것이 나에게 알리고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희준이가 왔다가 세 시간 있다 갔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아니 뭘 하다 갔나요 물어보니, 13세 아래 국민학교 1-2 학년이던 내 동생과 놀다가 동생 얼굴과 팔을 비누로 씻겨주고 갔다고.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고, 그때 붙은 정으로 커서 의사가 되어 서울대 의대에 있다가 지금은 아산병원에 있는 내 동생은 희준과의 교류를 끊이지 않았고 학술 논문도 공저를 하였다. 남들이 좋아하는 관계에 껴들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내 타고난 성격인 것 같다. 대학 3학년 때 덕적도에 1주 캠핑을 갔었는데 그때 희준도 있었고 다른 누구가 갔었는지 기억이 확실치 않다. 할 일들을 나누어 맡았는데, 내가 희준을 찾아보니 무슨 2백 페이지쯤 되는 책을 읽고 있어서 조금 부러웠는데, 호기심이 나면서도 뭐냐고 물어보지 않은 것 조금 후회가 된다. “희준아, 너 뭐 하기로 되 있는데 언제 할꺼니?” 내가 말하니까, “에이, 종민이같이 고집 쎈 사람 처음 본다” 해서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내가 고집이 정말로 쎈 사람인가, 그렇다면 그 고집을 어떻게 주물러야 원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때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생각을 그칠 수 없는 내 자신이다.

희준이가 우리 정릉집에 왔을 때, 마침 내 막내 이모가 희준이를 보고 “종민아, 너 왜 얼굴이 작아졌니?” 했으니, 희준과 내 얼굴이 조금은 닮은 얼굴이다. 내 기억이 자신은 없지만, 희준 조상들은 평안도 박천 출신이고, 내 쪽은 평안도 태천이니, 혹시 먼 옛날 같은 조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1977년쯤, 미시간 주 안아버에서 직장 다니면서,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으면서, 잠은 평균 5시간 밖에 못 자면서 몸은 족히 피골상접, 지금보다 무게가 27 킬로가 빠져 있었고, 허리 둘레도 지금보다 3분의1이 작은 26인치였고, 옷은 어른들 물건 쪽이 아니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만든 것을 사서 입었던 때였다. 그때 희준이가 날 보러 왔었다. 내 꼴을 보고 희준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어땠었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희준이를 보면 서로 말이 없어지고, 그러나 내 마음은 지극히 평화스러웠다.

내가 몇 년 전인가 올린 글에서 말했지만, 내가 만난 천재는 우리 동기의 김기목과 그의 동생 기협인데, 기협의 말에 의하면 기목이는 희준이를 자기와 동등한 천재로 여겼다고 한다. 기목이 미국 유학 가자, 기협이 나랑 놀자고 자주 찾아왔는데, 그것도 신기하였다. 왜 머리가 모자라는 나를 찾아오고 희준이를 찾아가지 않았는지. 내가 늦게 세운 가정이지만, 전기나 자기에서 같은 극들은 배척하고 반대의 극들은 서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이, 미인은 다른 미인과 동석하는 것을 싫어하고, 천재는 다른 천재 근처에 가지 않는 것.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이, 희준과 나는 서로 충분히 생각해 주는 상대였는데도, 술 같이 제대로 마신 적도 없다. 그럴듯한 화제로 오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다. 지금 만났으면 어떨지. 아니면, 우리는 영원히 가끔 봐주고 묵묵히 응원해 주는 사이인지.

희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가 포항공대에 있었던 2012쯤. 서울에서 회식을 했는데, 여전히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맘 편하게 앉아 있었고, 딱 하나 기억나는 희준의 말은 신의 존재를 과학적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 나에게는 이 주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다. 희준과 다른 견해의 아인슈타인: “종교는 과학적/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다.”

희준이 암 치료로 미국에 오자 Facebook 친구하자고 연락이 왔고, 그러면서 “종민아, 이제는 좀 연락하면서 살자.” 그러더니, 훌쩍 가 버렸다. 얘기하고 싶어도 얘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여태까지 다른 친구들이 갔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 아깝고 서운한데, 오래 있으니 그 기분이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영국의 당대의 시인 Coleridge는 “Shakespeare가 영국어를 불멸의 언어로 만들었으니, 우리 영국인들은 그를 불멸한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라고 했다. 불교에 전념하셨던 내 친할머니의 영향인지, 거기에다, 뒷마당 수풀이 큰 나무가 죽어야 그 밑의 작은 새끼 나무들이 햇빛을 받고 크고, 그러나 멀리서 보면 수풀은 언제나 그 모습을 유지하는 불멸의 존재라고 여기게 된 것이라서 그런지,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죽음은 불필요한 개념이라고 여긴다. 삶의 증거는 추억이고, 추억이 살아 있는 한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희준의 맑은 자태, 맑게 주위 사람들 대하는 태도, 그 정연한 우주관과 생명관, 그를 생각하면 내 자신도 뭔가 맑은 것에 가까워지고 싶어 진다. 희준이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마지막 말을 쓰면서 눈이 젖는 이유는 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