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목회 강연 뒤 열흘 쯤 지나고 나서야 아이폰에 녹음해 뒀던 음성메모를 열어 듣는다. 하루하루가 바쁘기도 하고 천성이 게으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진 편집하고 녹음파일 정리하면서 강연 후기 쓰는 일이 무슨 숙제라도 하는 것처럼 부담스럽기 때문인데, 이번 2월 강연 후기는 좀 다르다. 강연했던 이일항 동기가 유튜브에 녹음파일을 올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부탁조로 얘기했기 때문인데 괜찮은 사진 몇 장 골라서 슬라이드 쇼로 만들고 그냥 후기를 쓰면 되니까. 그런데 후기 쓰는 일은 쉽나? 보통 90분 정도 되는 강연을 두 차례쯤 거듭 들으면서 요지를 찾아내고 키워드를 메모하면서 요지와 키워드를 연결하며 얘기꺼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날 강연을 들으면서 “참 드물게 다른 인간형(?)을 찾았다.”라는 느낌이었다. 누가 누구와 다르다는 얘기인가? 느려 터지고 게으르고 뭐 하나 깊이 아는 게 없으면서 말은 많고 게다가 믿는 구석도 없이 自信하고... 그런 나와 그가 아주 다르다는 얘기다. 나를 뒤집으면 이일항이다. 부지런하기 그지없고 두루 깊이 알면서 겸손해 하고 믿는 구석이 있어 信心이 깊고... 그런 그는 강연을 시작하며 “세상 아무리 돌아다녀도 친구처럼 좋은 건 없는 것 같다.”는 말로 객석의 친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더니 오래전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It's a Wonderful Life!

“제임스 스튜어드와 도나 리드가 주연한 1947년도 옛날 영화로, 태어나서 고초 받고 사기 당하고 파산하게 된 주인공이 다리 위에 올라 투신 자살하기 직전 수호천사가 나타나 그를 그의 과거로 데려가 그가 얼마나 멋진 인생(Wonderful Life)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지금 죽으면 안되는 이유를 깨닫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사실 우리들도 얼마나 멋지고 은혜 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하며 그의 남다른 생각을 얘기한다. 그러면서 혹시나 나도 모르게 오늘 강연 중에 내 인생에서 멋지고 자랑스러운 부분을 내세우며 얘기하게 된다면 용서하세요. 어느 인생이나 멋지니까요... 라는 말을 한다. 나 같으면 ‘C'est la vie(이것이 인생이다.)’같은 그럴듯한 제목의 영화나 연극을 예로 들면서 인생 無常이니 流轉이니 본론을 벗어나면서까지 조금 알고 많이 얘기하는 지나침(過) 모자람(不及) 어리석음(愚)과 건방짐(慢)을 보였을 텐데...

강연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는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강연 주제가 “빛의 신비와 인간 문명”인데 말머리에 살아온 얘기 먼저 잠깐 하겠다며 시작했던 ‘제1부 : 경기 졸업 후 나의 삶’의 이야기가 끝나질 않는다. 우리 나이 이제 70이니 과거가 현재나 미래보다 길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과거(Wonderful Life)에 사연이 많기 때문일까? 그는 교동국민학교 나온 얘기, 경기중학교 고등학교 들어간 얘기, 우리 모두 어려웠던 시절 천정 白熱燈이 깜박거리는 걸 보면서 전기공학의 길을 가게 된 얘기, 미국 Bell 연구소 연구팀장 하다가 한국행하게 된 얘기,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단장으로 있으면서 ETRI 저널을 3년 만에 국제저널로 인정받게 했던 얘기, 그리고 다시 미국행하려다가 인하대학에 남게 된 얘기 등등... 이야기는 끝을 모른다.

그리고 정년을 맞아 무용지물로 용도폐기(그의 표현)되면서 중국 절강대학에 세계화의 특임을 맡아 석좌교수로 가게 된 이야기로 마무리하는데... 한 시간 반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 90분은 그의 개인사나 履歷(발자취)을 말하면서 보낸 시간이 아니라 한국에 돌아와 16년을 지내면서 보고 겪었던 한국 과학계의 실상과 여러 문제에 대한 우려였으니... 강연 후기를 길게 쓰기도 그렇고 길게 쓸 만큼 글 숨이 길지도 못해 몇 가지만 추려 본다.

◼ 훌륭한 과학자의 강연은 음악같이 들린다. 아름답다는 얘기다.

◼ Brain Drain... 오래 전에 여러 나라들이 미국으로의 두뇌유출을 걱정했는데 지금은 Reverse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을 보라. 중국은 이미 많은 분야에서 세계화되어 있다. 우리나라 정신 좀 차려야 한다.

◼ Justice... 정의란 무엇인가? Do what is right! 이것이 미국의 정신이다. 앞으로 손자손녀들이 미국 유학을 간다면 본인의 생각으로 자기소개의 글을 쓰게 하라. 미국은 ‘정의와 진실 그리고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다.

◼ 우리나라 대학 또는 교수의 연구능력 평가방법에 문제가 많아 연구논문의 우수성보다 횟수가 중요하다 보니 전반적인 연구논문의 수준이 좀 그렇다.

삼목회 10년을 넘고 100회를 넘는 동기들 강연 가운데... 강연 후기가 미완성인 경우는 처음이다. 지금껏 후기를 올리면서 강연 녹음을 첨부하거나 동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링크했는데 우선 저작권을 갖고 있는 강연자가 recording은 하되 off the record로 해달라는 요청이 있고 보니 후기라도 자세히 강연 내용을 알려야 하건만 물 흐르듯이 진행된 강연을 한 두 페이지로 압축해 낼 논리력이 내겐 어림도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닐까?

강연을 들으며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몇 가지 생각을 결론으로 정리하며 후기를 마무리한다. 

첫째, “훌륭한 과학자의 강연은 음악같이 들린다.”는 이일항의 놀라운 말에 누군가 객석에서 “과학자들의 전반적인 깨달음 수준이 인문학자보다 높다.”는 말을 한다. 그렇다. 歸納이든 演繹이든 논리가 인문학의 바탕이라면 과학은 實事求是와 格物致知의 뜻 그대로 진리를 찾는 일... 인문학이 論理라면 과학은 眞理라는 말이다. 논리로 다투지 말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미래의 正道가 아닐까? 과학과 예술을 우리나라 교육의 최우선으로 삼자!

둘째, 이일항의 강연을 들으러 모인 동기들이 평소보다 조금 많게 스무 명 남짓인데 그 가운데 이만재, 오원탁, 박영준, 김재삼, 임정재, 박완서, 정태승, 김능배, 고승희 등이 눈에 띈다. 아! 이 친구들이 우리 고등학교 동기들이구나. 이 친구들 말고도 너무나 똑똑한 많은 친구들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한 고등학교 한 학년에 이렇게도 많은 인물들이 모일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교육을 밑둥부터 바꾸자. 평준화 정책을 포기하고 다시 영재학교들을 부활시키자.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경쟁하고 커나가는 乘勝長驅! 

셋째, 그의 강연 2부 “빛의 신비와 인간 문명”은 3월 삼목회에서 이어집니다.